[문화속으로] 행복한 삶의 조건

입력 2014-08-09 08:00:00

며칠 전, 점심을 먹고 들어오니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어떤 학생이 몰래 갖다놓은 것이었다. 겉봉에는 꼭 읽어 봐 달라는 애교성 당부가 또랑또랑 적혀 있었다.

요즘 학생들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감정을 애써 숨기려 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또 교장이라고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교장실에 있어 보면 시시콜콜한 요구 사항을 쪽지에 적어 와 스스럼없이 내밀기도 한다. 주로 학교생활과 관련된 것들이 태반인데, 나는 가능하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큰 틀에서 생각하면 득보다 실이 많을 때는 그 학생을 불러 그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를 당부한다. 그러면 십중팔구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싹싹하게 돌아선다.

이번에도 그런 종류의 편지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자신의 진로에 관한 것이었다. 자기는 방송'언론 계통으로 진출하고 싶어 그쪽 계열의 학과로 진학하고 싶은데 부모님은 좀 더 장래가 확실히 보장되는 학과로 진학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자기 엄마는 과거에 나에게 배운 적이 있다며 부모를 설득해 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과거 내 주변에서 있었다. 내가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는 걸 알고 지인이 자문을 구해 왔다. 자기는 딸을 법대에 보내 행정고시나 사법시험을 치게 하고 싶은데 자기 딸은 죽으라고 국문학과에 진학해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행복한 고민을 해도 좋을 만큼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이 뛰어났다. 나는 딸의 생각을 들어보고 의지가 확실하면 딸이 원하는 학과로 보내주는 게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나를 통해 딸을 설득할 묘안을 기대했던 그는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그 탓인지 더 이상 자문을 구해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지인의 바람대로 딸이 진학했다고 했다. 조금 있으면 고시 합격 소식이 들려오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지인을 통해 들으니 안타깝게도 그 딸이 진학 후 엄발나 하라는 고시 공부는 안 하고 노동운동에 웅숭깊게 빠져 그 부모가 아주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는 것이다.

장자 외편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노나라 수도 근교에 바닷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는데, 이를 본 노왕이 상서로운 징조라 하여 그 새를 모셔다가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 새에게 종묘의 술을 올리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는가 하면 악사들을 초빙하여 순임금 시절의 음악까지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만 바닷새가 죽고 말았다.

바닷새는 왜 죽었는가? 모름지기 새란 숲 속에 둥지를 틀고 들판을 자유롭게 날고 강이나 호숫가를 떠다니면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때로는 다른 새들과 어울려 날다가 갈대나 바위 끝에 앉아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그래야 즐겁고 행복한 법인데, 인간의 예법으로 바닷새를 대접했으니. 무릇 생명을 가진 자는 슬픔이 극에 달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인도 출신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가 초대를 받아 어떤 집을 방문했더니 초대인의 딸이 섧게 울면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초대인이 말했다. "제 어릴 적 꿈이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저의 못다 이룬 꿈을 내 아이를 통해 이루고 싶었습니다. 이런 어미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피아노 치기가 싫다고 저렇게 울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초대인은 자신도 모르게 제 부모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혹시, 나의 욕심과 집착이 내 아이를 '장자의 바닷새'나 '초대인의 딸'처럼 슬픔에 젖게 하지나 않는지 한 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원칙적으로 물을 좋아하면 물에서 놀게 하고 산을 좋아하면 산에서 놀게 해 줘야 한다. 그래야 장차 그 아이의 삶이 더없이 짐벙지고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이연주/소설가·정화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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