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청춘의 꿈이 소멸하는 시대다. 학력과 학점, 토익 점수 등을 합해 이르는 신조어인 '스펙'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고유명사가 된 지 오래다. 꿈의 종착점은 대기업. 성공적인 취업을 위해 어학연수와 인턴, 봉사활동, 공모전 수상 경력 등을 더해 '스펙 7종'이라는 말도 나온다. 인생에서 가장 싱싱해야 할 20대의 삶은 토익 점수 때문에 도서관 책상 앞에 파묻힌다. 이 기사는 토익 만점자, 대기업 입사자들의 취업 성공 팁을 담은 기사가 아님을 독자들에게 미리 알려 드린다.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 꿈을 좇아 사는 청춘들을 찾았다. 그래서 인터뷰를 하며 토익 점수는 아예 묻지 않았고, 출신 대학도 기사에 쓰지 않는다.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 세계 각국에서 젊음의 가능성을 펼치고, 새로운 꿈을 찾은 20대들을 만났다.
◆콩고에서 얻은 것들…강은영 씨
가난하고 위험한 나라, 나를 성장시켜준 나라
아프리카에는 콩고가 두 개 있다. 하나는 DR콩고라고 불리는 콩고민주공화국이고, 나머지는 콩고공화국이다. 강은영(26) 씨는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DR콩고에서 6개월을 보낸 '간 큰' 대학생이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그는 지난해 9월부터 6개월간 현장실습원 자격으로 수도인 킨샤사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도 자리가 났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는 생각에 DR콩고를 택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상황이 너무 열악하니까 우는 여자들도 많대요. 저는 '생각보다 괜찮은데요?'라고 말해서 주변 분들이 깜짝 놀랐대요. 유니세프 홍보 영상에 나오는 그런 열악한 모습을 상상했거든요. 나중에 인터넷에 검색하니 '강간율 1위' 등 미확인 정보가 떠돌던데 차라리 모르고 지낼 걸 그랬어요. 하하."
DR콩고는 가난한 나라다. 2013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는 241달러로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곳이다. 치안도 불안하다. 지난해 12월 킨샤사의 국영방송과 공항, 군사기지 등에 무장 괴한들이 공격을 가해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강 씨가 콩고에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일이 아니라 거리를 마음껏 걷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DR콩고는 아직도 UN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을 만큼 치안이 좋지 않아 외국인들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 숙소와 직장을 오갈 때나 가까운 곳에 갈 때도 항상 차를 타고 움직였다"며 "걷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콩고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얻은 것도 많다. 국경일 행사부터 한국 힙합 공연단 행사, 한국영화제 기획 등 다양한 업무를 스스로 기획하고 추진하면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강 씨는 "권한이 많은 만큼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았다. 한국 힙합팀이 공연하러 왔다가 현지 호텔에서 도난 사고를 당하고, 호텔 직원들이 발뺌해서 진땀을 빼기도 했다"며 "이런 위기를 겪으면서 조금 더 성장한 것 같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경험"이라고 말했다.
◆행복의 조건을 찾은 파라과이…강선정 씨
부족함 속에서 비움의 지혜 배워
강선정(25) 씨가 파라과이로 간 것은 2012년 3월. 대학 친구들이 취업 전선으로 뛰어들 무렵, 휴학을 하고 파라과이로 떠났다.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복수 전공했던 강 씨는 중남미에 가고 싶었다. 가진 것은 기초 스페인어 실력과 모스(MOS) 자격증이 전부였지만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중남미권 봉사단원에 지원했고, 덜컥 합격했다. "엘살바도르와 도미니카공화국도 봉사단원을 뽑았는데 경찰청 컴퓨터 시스템 조작 등 제 컴퓨터 실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파라과이에 지원했어요. 면접 볼 때 컴퓨터 관련 박사 학위를 받은 지원자도 옆에 있었는데 제가 뽑혔어요. 저도 놀랐어요. 하하."
2년간 터를 잡은 곳은 파라과이 수도인 아순시온에서 차로 6시간 떨어진 필라르(Pilar)였다. 강 씨는 "강 사이로 아르헨티나 국경을 마주 보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필라르 시청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기초 교육 업무를 맡았고, 일을 시작하자마자 공학 박사를 제치고 그가 뽑힌 이유를 알게 됐다. 필라르에는 컴퓨터가 없는 집이 많았다. 10살짜리 애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컴퓨터 전원을 끄라"고 하면 모니터 전원만 끄고 교실을 나갔고, "마우스 더블 클릭이 너무 어렵다"며 강 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강 씨는 "파워포인트에 이미지와 음향 효과를 넣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엄청나게 좋아하더라"며 웃었다.
'정'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현지인 집에 초대받을 때마다 "Mi casa es tu casa"(내 집이 네 집)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 가는 집인데 원래 알던 사람처럼 대해줬어요. 그 집 딸이 제 친구면 저도 완전 딸 대접을 받았어요." 넘치는 정 때문인지 볼 키스도 두 번씩 했다. 한 번 뽀뽀하면 다른 쪽 볼에 뽀뽀할 때까지 볼을 대고 기다렸다.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무용담이 됐지만 첫 번째 홈스테이 집은 '최악'이었다. 화장실 하나를 7명이 나눠 쓰고, 매일 돌아가는 재봉틀 때문에 시끄러운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집주인이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우리 돈으로 26만원, 한 달치 생활비를 빌려줬는데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강 씨는 "아껴 먹는 한국 라면을 한 입 줬는데 '맵고 맛없다'며 내가 보는 앞에서 바로 뱉어서 마음이 상했다. 어딜 가나 좋은 사람만 만날 수는 없다. 문화 차이라기보다 성격 차이"라며 웃어넘겼다.
파라과이에서 배운 것은 '비우는 법'이다. 그곳 사람들은 전통차 '떼레레'와 집, 가족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강 씨는 여태 컴퓨터 없이 잘 살아왔는데 자기가 욕심을 심어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마음을 비우니 새로운 꿈이 빈자리를 메웠다. 바로 인디언들의 인권보호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제가 파라과이에 있을 때 대통령궁 뒤에 살던 인디언들이 모두 쫓겨났어요. 원래 파라과이는 인디언들 땅인데 대접받지 못하고 사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가을에 복학하고 취업도 해야겠죠. 하지만 언젠가 남미로 다시 돌아가서 공부하고, 그들을 돕고 싶어요."
◆볼리비아에서 이룬 축구 심판의 꿈…박정욱 씨
공동체 가치의 중요성 확인한 1년
볼리비아에서 축구 심판을? 처음에 기자는 박정욱(29) 씨의 이야기를 쉽게 믿기 어려웠다. 이런 생각을 눈치 챘는지 박 씨는 수많은 '팩트'를 들고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박 씨는 "내가 입은 옷은 볼리비아 국가대표 유니폼이고, 이건 볼리비아 체육협회에서 준 감사패"라며 접시같이 생긴 물건을 기자 앞에 내밀었다. 흔하고 흔한 것이 남자들의 '축구 사랑'이라지만 박 씨는 남달랐다. 축구 선수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자신의 한계를 일찌감치 깨달은 뒤 학업에 매진했고, 대학에 진학한 뒤 틈틈이 공부해 대한축구협회에서 '축구심판 3급' 자격증을 땄다. 박 씨는 "중등 리그에서 심판을 봤고, 지금은 경력이 쌓여 2급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 자격증은 볼리비아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2012년 11월부터 1년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 살았다. KOICA 사무소 행정 인턴으로 전국에 흩어진 봉사단원을 관리하는 것이 본업이었지만, 축구의 대륙 남미에서 심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라파스에 온 지 한 달이 되던 날, 그는 무작정 가장 큰 축구 경기장을 찾아가 현지 심판에게 접근했고, 더듬거리는 스페인어로 "한국에서 온 축구 심판"이라고 소개했다. 말보다 빠른 것은 몸짓이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경기 내내 공을 주워 날랐고, 음료수를 배달했다. 그의 열정을 높이 샀는지 "다음 주부터 나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타국에서 축구 심판을 보는 일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볼리비아 축구는 한국보다 더 거칠었다. 심판에게 욕을 하는 것은 예사였다. 박 씨는 "선수들이 나한테 와서 스페인어로 뭐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욕'이었다. '치노'(스페인어로 중국인을 뜻하며 아시아인을 얕잡아 보는 말)라며 인종차별성 발언도 많이 했다. 그래서 나중에 스페인어를 배운 뒤 나도 같이 선수들한테 욕했다"고 말했다. 폭행도 난무했다. 박 씨는 심판을 보다가 판정에 불만을 품은 감독에게 코를 맞아 쌍코피가 터진 적도 있었다. 그는 "코뼈가 안 부러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가 빠진 동료 심판들도 자주 봤다"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 남자의 열정을 볼리비아 현지 언론도 알아봤다. 볼리비아 기자가 그를 인터뷰해 현지 일간지 '씨에떼 리가스'(sieteligas)에 기사를 실었고, 그 덕에 유명세를 탔다. 박 씨는 "기사가 나간 뒤 '치노'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꼬레아노'(한국인)라고 부르더라"며 사진이 실린 신문을 내밀었다. 볼리비아 대통령을 만나는 영광도 누렸다. 박 씨는 "축구장 개장 기념 경기에 참석한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만나 인사했는데 태국 사람인 줄 알았는지 합장을 하며 인사해서 깜짝 놀랐다"고 껄껄 웃었다.
볼리비아에서 보낸 1년간 그는 '공동체' 가치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했다. 우리 사회는 갈수록 모래알처럼 파편화되고 있지만 볼리비안인들은 무엇을 하든 항상 '함께'였다. "라파스는 볼리비아 수도였는데도 시골에 사는 느낌이 들었어요. 돈에 쫓기고, 경쟁에 쫓기지 않았어요. 앞으로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고,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 가치를 실현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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