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에게 해(海)를 건너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한여름의 기온이 40℃를 오르내리지만 습기가 적고 바람도 그리 인색하지 않아 오히려 대구의 무더위보다 견딜만하다. 크레타 섬은 청동기 시대의 미노아 문명을 기반으로 하여 세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곳이다. 그리스 문명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의 원조였고, 강력한 왕권 국가로 주변국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아테네도 예외는 아니어서 크레타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다.
테세우스가 아테네의 영웅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였다.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자청한 그는 검은 돛을 단 배를 타고 크레타로 향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흰 돛을 달아 승리를 알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미궁에 들어가 괴물을 처단하고 승리를 했지만, 그는 돌아오는 길에 돛을 바꿔 다는 일을 잊어버렸다. 자나깨나 아들의 무사귀환을 기다리던 아버지 아이게우스(Aigeus)는 아들이 괴물의 밥이 된 줄 알았다. 그리고 절망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 바다가 '에게(Aegean) 해'가 된 사연이다.
테세우스의 용맹스러움 덕택에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아테네는 드디어 세상을 향해 창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어 크레타를 변방으로 삼았고, 크레타는 그때부터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크레타를 다시 깨워 창문을 열어 젖힌 사람은 20세기 최고의 문호 카잔차키스였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인 그는 크레타에서 태어났다. 터키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독립 전쟁을 치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유를 찾고 싶었던 그는 그리스의 본토로 순례를 떠나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주체인 '나'와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아우른 절대 자유를 추구했지만, 노벨상은 카뮈에게 양보해야 했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 끼어 살아가는 그리스인들이야말로 그런 자유인임을 세상에 선포하여 많은 공감을 얻었다.
나는 에게 해를 건너 성큼 크레타 섬에 발을 디뎠다. 테세우스와 카잔차키스가 왕래하던 그 통로다. 크레타에서는 테세우스 덕택에 더 이상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스스로 카잔차키스의 젊은 광산업주가 되었다. 그리고 노년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 그를 광산의 현장 감독으로 고용했다. 낯선 마을에서 이방인처럼 겉도는 '나'와는 달리, 그는 호방한 성격이었다. 언제나 산투르라는 악기를 가지고 다니며 즉흥연주로 춤과 노래를 즐기고, 물레를 돌리는 데 거치적거린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를 자른 기인이기도 했다. 터키와의 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속박되기 싫다며 뭇 여성들과 맘대로 놀아난 바람둥이기도 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는 조르바는 언제나 합리적이길 원하는 모범생인 '나'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리고 거칠고 생생한 삶의 현장을 맛보게 해주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마을에서 '내'가 젊고 아름다운 과부와 조심스레 사랑을 시작했을 때였다. 신이 질투를 했는지, 한 마을 청년이 그녀를 짝사랑하다 실연당하고 자살을 했다. 마을 남자들은 부활절 날, 그것도 교회 앞마당에서 그녀를 돌로 쳐 죽이고 말았다. 이 기막힌 모순의 엇박자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집단적 광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절망에 빠진 '나'는 광산 사업마저 실패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조르바는 쓰러진 나를 끌어당기며 어깨춤을 추자고 했다. 아무 해답도 주지 못하는 책 따위는 덮어버리라고 했다. 사람은 어느 정도 미쳐야 하고, 미치지 않으면 밧줄을 끊어버릴 용기가 없으니 자유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바람이 부는 대로 허공에 몸을 맡겼다. 해방과 자유의 내음을 실은 파도가 그 순간 쏴~하며 나의 가슴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폴론형의 인간인 나는 결국 조르바의 그 디오니소스적인 순수한 야성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미쳐버린 나의 영혼을 부여잡고 카잔차키스의 무덤을 찾았더니 그는 자신의 빗돌에다 이렇게 새겨두었다. "나는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두려운 것이 없다. 나는 자유인이다!"
김중순/계명대 교수·한국문화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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