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슬프게도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목적지는 영국. 런던을 거쳐 스코틀랜드 주도인 에든버러를 찍고 오는 일정을 현지에 도착해서 즉흥적으로 잡았다. 여행을 앞두고 만난 지인이 파운드화와 함께 건넨 이야기가 이번 여행의 방향이 됐다. "워크 투어 한 번 해봐. 정말 인상적이었어."
워크 투어는 거리를 걸으며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현지인이 설명하는 '무료 가이드'다. 장대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 스무 명이 투어 출발 장소인 공원에 모였다. '런던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 남성이 이날 가이드였고, 버킹엄 궁전을 시작해 빅벤 앞에서 끝나는 두 시간짜리 코스에서 가이드북에 없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버킹엄 궁전의 여왕 침실까지 최초로 침입한 남자는 아일랜드 출신의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시작이었다. 또 몇 년 전 여왕 근위병이 심기를 건드리는 콜롬비아 관광객의 멱살을 잡는 바람에 현재 근위병 주변에 울타리가 생겼다는 사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영웅인 넬슨 제독이 전사한 뒤 그의 시신이 부패하지 않게 프랑스산 위스키에 담가 런던으로 가져왔는데 술을 좋아하는 영국 선원들이 관속에 담긴 위스키까지 마셨다는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하게 들려줬다.
뼈 있는 현실 비판도 있었다. 가이드는 런던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워털루 지역으로 우리를 데려간 뒤 런던의 '미친 집값'을 설명했다. 자신은 런던 외곽에서 하우스 메이트 4명과 산다면서, 매달 집세로 1천파운드(우리 돈 약 180만원)를 쓴다고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런던 사람들은 집을 사면 제일 먼저 가장 비싼 TV를 사요. 집값이 비싸니까 집에 오래 있어야죠." 두 시간짜리 투어가 끝난 뒤 우리는 입담 좋은 가이드에게 소액을 기부했다. 통 큰 뉴질랜드 할아버지는 20파운드를, 나는 눈치를 보며 5파운드를 건넸다. 그가 "여왕 얼굴이 새겨진 지폐를 준다면 더 감사하겠다"는 귀여운 압력을 준 탓도 있었지만 번 돈 대부분을 주거비로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비싼 도시에 사는 그가 가여워졌다.
영국은 이야기를 파는 나라다.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의 살인 현장을 추적하는 투어를 팔고, 영국식 술집인 펍을 찾아 맥주를 마시는 '펍 투어'와 비틀스 투어, 어두운 역사를 조명하는 '다크 패스트 투어'(Dark past tour) 등을 개발해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로 엮어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내가 사는 대구도 이야기가 많은 도시다. 대구의 근대 역사를 걷기 여행으로 연결한 골목투어 덕분에 회사 옆 계산성당에는 언제나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심술궂은 영국 날씨를 감안하고서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나라를 찾는 것은 그곳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북성로에서는 근대 역사 개발이 한창이다. 내 동네 대구의 숨은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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