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잘라 낸 시간

입력 2014-07-04 10:53:58

1973년 비행기 사고로 30세에 세상을 떠난 미국 포크 가수 짐 크로스가 남긴 '병 속의 시간'(Time In A Bottle)이라는 곡이 있다. 최근 개봉한 외화 'X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도 삽입된 이 곡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I Got A Name'과 함께 짐 크로스의 대표곡이 됐다. 통기타의 아름다운 아르페지오 선율에 '시간을 병 속에 담아둘 수 있다면, 맨 먼저 하고 싶은 일은 하루하루를 저장해 영원토록 당신과 함께 쓰고 싶습니다. 이 날들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다면, 말이 소원들을 이루게 할 수 있다면, 하루하루를 보석처럼 담고 또 담아 당신과 함께 쓰고 싶습니다'라는 예쁜 가사가 담겨 있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함께 연상되는 것은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라는 시조다. 학창시절, 이 시조를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은 충격이었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미모의 여성이라는 로망에다 '임이 떠난 뒤 더디고,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허리를 베어 내, 이불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시는 날 꺼내 쓰겠다'는 그녀의 상상력은 참 놀라웠다. '병 속의 시간'은 감미롭지만, 가사의 표현력에서는 확실히 몇 수 아래로 보인다.

1981년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났던 가수 김추자 씨가 33년 만에 새 음반을 내고 공연도 했다. 1951년생인 김 씨는 올해 우리 나이로 환갑을 훌쩍 넘은 64세다. 그녀는 1969년 데뷔음반 '늦기전에'로 시작해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구속되기 전까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거짓말이야' '님은 먼 곳에' '무인도' 등을 당시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도발적인 몸짓과 특유의 솔풀(Soulful)한 창법으로 불러 제친 원조 '섹시 디바'였다.

전성기 때만으로 본다면, 당시 그녀에게 열광했든, 탐탁지 않게 생각했든 간에 모두에게 40년이라는 시간이 공평하게 흘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짐 크로스의 노랫말과 황진이의 시조처럼 시간을 뭉텅 잘라 내가 원하는 시간에 꺼내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월남이 아닌 과거로부터 돌아와 그때의 감흥을 일깨우는 김추자 씨를 보면, 마치 언젠가 잘라 내어 보관했던 시간을 지금 꺼내 그녀와 함께 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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