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다는 한국 맥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입력 2014-06-28 07:29:29

100여 년 맥주史 통해 본 맥주 산업의 현주소-미래

국내 맥주산업이 양대 맥주회사에 의존해 발전해오면서 맥주의 다양성을 오히려 저해했다는 비판이 있다. 국내 양대 맥주 제조사들의 광고 포스터들. 각사 제공
국내 맥주산업이 양대 맥주회사에 의존해 발전해오면서 맥주의 다양성을 오히려 저해했다는 비판이 있다. 국내 양대 맥주 제조사들의 광고 포스터들. 각사 제공

슬프게도, 세계에서 한국 맥주의 위상은 약하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은 소주는 엄지를 치켜들 만큼 맛을 높이 평가하지만 맥주는 그들 앞에서 영 힘을 못 쓴다. 세계맥주 평가사이트인 '레이트비어'(ratebeer)에는 '그냥 취하는 게 목적이라면 실컷 마셔라'는 혹평도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우리 기술로 직접 맥주를 생산해 마시고 있지만 맥주는 우리 '전통술'이 아니다. 수백 년 양조 역사를 지닌 외국 맥주와 경쟁이 쉽지 않은 이유다. 한때 밥 한 끼보다 비쌀 만큼 '고급술'이었던 맥주.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맥주사'를 살펴봤다.

◆식민지 역사와 함께한 맥주

1755년 조선에도 '맥주'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86권에는 음주에 관대한 영조가 금주령을 선포하면서 '맥주'(麥酒)와 탁주는 제외시켰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현대적인 개념의 맥주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개항 이후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은 뒤 일본 삿포로 맥주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이후 에비스와 기린 맥주가 차례로 들어왔다. 이때 수입 술이었던 맥주는 비쌌고, 일부 고위층만 향유하는 술이었다.

맥주 소비량이 본격적으로 는 것은 1910년대다. 이 무렵 일본이 주세령을 발령해 집에서 만들어 먹는 술인 '가양주'를 금지하면서 전통주의 맥을 끊었고, 그해에 일본 맥주회사의 서울 출장소가 생겨 맥주를 보급했다. 1920년대에 수입 술 가운데 맥주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해도 맥주는 여전히 비싼 술이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기사를 참고하면 당시 맥주 한 병은 75전, 일본비빔밥 1인분은 50전이었다. 밥보다 비싼 술이었다.

193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맥주 공장인 '조선맥주회사'가 생겼다. 일본 맥주의 계열사인 이름에 조선이 들어갔을 뿐 자본과 기술은 모두 일본 것이었다. 맥주를 연구하고, 만들고, 유통하는 기술은 모두 일본에 있었다. 기린 맥주가 같은 해 12월 '동아맥주회사'를 설립하면서 일본이 중심이 된 한국의 맥주 역사가 시작됐다. 맥주가 생산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원하는 대로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1940년대 맥주는 '배급'식이었다. 회사와 은행, 단체 등 직원과 종업원들에게 '맥주원'을 통해 1인당 한 병씩 판매하기도 했다.

조선맥주와 동양맥주는 하이트맥주(현 하이트진로)와 OB맥주의 전신이 됐다. 조선맥주는 하이트, 동양맥주는 OB맥주로 각각 사명을 바꿨으며 양대 맥주 회사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점유율 싸움을 했다. 1993년 조선맥주는 '하이트맥주'라는 신제품을 출시했다. '지하 150m 천연암반수'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마케팅을 실시했고, 1993년 시장 점유율 43%를 기록하며 동양맥주를 꺾고 1위 자리에 올랐다. 현재 OB맥주는 한국 기업이 아니다. 두산그룹은 1998년 맥주사업 철수를 선언하고 OB맥주의 지분 50%를 벨기에 맥주회사인 인터브루(현 인베브)에 매각했고, 나머지 지분도 매각했다.

◆한국 맥주 맛없다?

대기업이 생산한 한국 맥주를 마신 뒤 '맛있다'며 칭찬하는 외국인을 만나기란 드물다. 서울에 사는 미국인 알렉스 린즈넥(32) 씨는 "미안하지만 한국 맥주가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입이 미국 맥주나 수제 맥주에 익숙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맥주는 싱겁다"고 평가했다. 미국인 저스틴 하이웰 씨도 "하이트와 카스는 둘 다 너무 달고 끈적하다. 특히 카스는 우유에 시리얼을 넣어 먹는 것처럼 끈적한 곡물 느낌이 많이 난다"고 말했다. 미국인 대학원생 줄리안 오트(35) 씨는 "한국 주류회사들이 연구개발비를 소주를 마신 뒤 '더 상쾌한 아침'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한 소주 광고를 인용해 다양하지 않은 한국의 맥주 시장을 비꼬았다.

이들의 말대로 한국 맥주는 다양하지 않다. 벨기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맥주 브랜드만 500여 가지가 넘지만 우리나라 맥주는 '하이트'와 '카스' 크게 두 가지로 양분돼 있다. 국내 맥주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오비맥주가 약 54.5%, 하이트진로가 약 34.8%이다.

국내 맥주산업이 양대 맥주회사에 의존해 발전해오면서 맥주의 다양성을 오히려 저해했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이유다. 전직 이코노미스트 기자였던 영국인 대니얼 튜더 씨는 지난해 펴낸 도서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한국의 '맥주 민주화'는 아직도 멀었다. 다양하고 역동적인 문화를 가진 한국이 맥주는 다양하지 않다"며 대기업 독점 체제인 한국 맥주 시장에 쓴소리를 했다. 그는 한국인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서울에 맥주집을 차려 직접 만든 에일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한국 맥주의 맛이 평가절하되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인들의 높아진 '입맛' 탓이다. 해외여행객이 증가하면서 타국에서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맛보고 비교하는 이들이 늘었다. 대학생 권혁인(27) 씨는 "2008년 여름 독일 뮌헨에서 1ℓ 유리잔에 부어 마셨던 맥주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HB 맥주였는데 흑맥주가 아닌데도 맛이 깊고 짙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변화하는 맥주 시장

덩달아 수입 맥주 시장도 커지고 있다. 한국주류수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된 맥주 규모는 8천966만달러(약 968억원) 정도로 2009년 수입액인 3천716만달러보다 141%나 증가했다.

최근 맥주 시장에도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하이트진로와 OB가 독점했던 시장에 탄탄한 유통망을 무기로 롯데가 뛰어들었다. 충북 충주에 맥주 공장을 세운 뒤 '클라우드'를 선보였고, 하이트진로와 OB도 에일 맥주로 맞서는 등 다양한 제품군을 내놓고 있다. 롯데가 끼어들었다고 해도 어쨌든 대기업들의 맥주 싸움이다.

한국 맥주의 다양화는 소규모 맥주 제조사인 '마이크로브루어리'의 활성화에 달려 있다. 2002년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소규모 양조장 설립이 가능해졌으나, 제조한 맥주를 매장 안에서만 팔 수 있어 유통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올해 4월 개정된 주세법에 따라 소규모 맥주, 즉 하우스 맥주 제조자들도 외부 유통을 할 수 있게 됐다. 지금껏 맥주 시장을 독식해왔던 대기업들도 이 같은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

하이트진로 대구경북본부 관계자는 "우리나라 맥주 상표를 다 더해도 50개가 안 되고 하이트진로에서 나오는 대표 맥주도 5개 정도다. 최근 영국식 에일 맥주를 출시한 것도 맥주 소비자들의 욕구가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졌기 때문"이라며 "우리도 소비자들의 반응을 고려해 앞으로 다양한 맥주를 개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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