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少年의 애국심,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다"

입력 2014-06-25 10:49:34

한국전쟁 참전 소년병들 헌법소원 낸 배경·의미는?

20일 대구 앞산공원 내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제17회 6
20일 대구 앞산공원 내 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열린 제17회 6'25참전 순국소년병(2,573위) 위령제에서 소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소년병들은 무훈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애국심을 후세에 전하고 싶어 헌법소원을 냈다.

소년병들은 6'25전쟁 당시 15~17세 어린 나이에 펜 대신 총을 잡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국방부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소년병은 2만9천600여 명이었다. 생존해 있는 소년병은 7천여 명으로, 80세의 고령이 됐다.

◆징집 위헌'국회 책무 방기

소년병들은 청구 취지에서 국방부 장관이 청구인들을 강제징집한 것은 법치주의 원리를 위배하고 청구인들의 아동권 등을 침해한 행위로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또 강제징집으로 인해 아동의 권리 등을 침해한 상태에서 아무런 입법조치를 하지 않고 있는 국회의 부작위도 위헌임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소년병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어린 나이에 징집됐다. 1950년 8월 당시 대한민국 법률에는 17세 이하 소년병에 대한 징집의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병역법 제23조에 따르면 징집대상자는 '매년 9월 1일부터 익년 8월 31일까지에 있어서 연령 만 20세에 달한 남자'로 규정하고 있다.

전쟁과 같이 위급하고 급박한 시기에 어떻게 헌법이 정한 절차를 일일이 다 준수할 수 있느냐는 주장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21일 공포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근거해 창설됐다. 국회는 1950년 7, 8월 대구에서 임시회를 개최했고 그 후에는 부산에서 의회를 열었다. 국방부 장관은 임시회에서 병역법 개정을 통해 17세 이하의 아동들을 징집할 수 있었다.

강제 징집은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했다. 제대로 된 군사교육과 훈련도 없이 총과 실탄만을 주고 낙동강방어선 전투 등 치열한 전투에 배치한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소년병들은 "국회는 강제징집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소년병에 대한 배상 입법을 하지 않고 있다. 입법 의무를 위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육 기회 잃어

국방부에 따르면 6'25전쟁 참전 소년병 2만9천603명 가운데 전사자는 2천573명이다. 당시 참전한 소년병의 10% 정도다. 전사자는 1950년과 51년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와 중공군 참전 이후 희생이 많았다.

대다수 소년병들은 어린 나이에 다양한 동기를 갖고 입대했다. 이들은 군번을 받고 주요 전투에 참전해 사선을 넘어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았지만 또 한 번의 수난을 만났다. 제대기간의 연장이었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끝났지만 거의 대부분이 신설부대의 창설 요원이 되거나, 만기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서 군에 남아야 했다.

'학도의용군'과 달리 소년병들은 대부분 4년 동안 복무했다. 학도의용군들은 학교 복귀가 결정됐지만 소년병들은 징집 직후 정식 군번을 받은 현역병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제대 뒤 소년병들은 중학교 6학년 복학을 요구했지만 학교는 5학년부터 다니라고 했다. 소년병들 대부분은 집안 형편이 어렵고 나이가 많아 학업을 그만뒀다고 한다. 소년병들은 어린 나이에 입대해 전쟁을 치른 뒤 제대했기 때문에 다시 학교로 복귀할 수가 없어서 바로 생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정당한 평가 원해

정부와 해당 부서는 소년병에 대한 실체를 인정했다. 국방부는 60여 년간 소년병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다가 2010년 국민권익위원회의 권유로 (정규) 군인으로 실체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국가적 보상체계에 대한 논의는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년병들의 무훈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들의 무한한 애국심을 후세에 전하는 사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을 조속히 통과시킬 수 있도록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유관기관 가운데 실질적으로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담당하는 국가보훈처의 구체적인 정책지침 수립이 급하다.

소년병 참전자를 위해 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원도 마련돼야 한다.

소년병들은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한 현실에서 행적을 기리고 기념할 수 있도록 기념비를 설립하고 추모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소년병에 대한 처우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생존 소년병들은 현재 정부로부터 참전수당만 받고 있다. 국가유공자 지정 관련 법안은 번번이 폐기됐다. 박태승 6'25 참전 소년병 전우회 회장은 "살아있는 소년병은 이제 80대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면서 "보상이나 배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희생의 정당한 대가와 평가를 받고 싶어 헌소를 냈다"고 했다.

※키워드

▷6'25 참전 소년병=전쟁이 발발한 이후 군번을 받은 정규군으로서 그 학적 소유를 불문하고 만 17세 이하의 나이에 조국수호를 위해 전후방에서 근무하고 일정기간의 복무완수(상이 포함)로 인해 제대한 자를 말한다.

▷학도의용군=전쟁 발발 시부터 1951년 4월까지 학생 신분으로 지원해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치안유지 등에 참가해 군과 경찰의 업무를 도와주었던 개별적인 학생 또는 단체를 말한다.

▷재일학도의용군=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재일학생 신분으로서 전쟁 발발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국군 또는 연합군에 자원입대하거나 개인의 자격으로 지원해 6'25전쟁에 참전하고 제대한 사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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