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의 시와 함께] 김씨의 옆얼굴

입력 2014-06-23 07:33:51

이하석(1948~ )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얼룩져

그의 얼굴은 어둡고 술 취한 듯하다.

육교 밑으로 휴지를 쓸어갈 때

발 밑을 구르는 신문지 조각을

때로 주워 읽는다. 길 가, 인도와 차도를 가로지른

철제 난간에 앉아, 그는 먼지 속처럼 아득히

버마 사건의 그 후와 최근의 학원 사태를 느낀다.

그것들은 그의 코 언저리를 붉게 하고

깊은 줄이 패인 이마를 불룩거리게 한다.

청소가 끝날 때 쯤, 그의 귀 언저리 털에서

이 거리의 마지막 먼지가 부스스 떨어진다.

중앙로의 오늘 그가 맡은 구간은 은사시나무길,

비와 바람과 불빛과 사람들이 자주 흐르는.

50이 넘어서면서 자꾸 허리가 결리고,

그는 목뼈를 주먹으로 자주 두드린다.

신문엔 안 났지만, 레이건이 중공을 방문하기 직전에 그랬을 것처럼,

때로 그는 자, 신나는 일이 있을 꺼야 하고 중얼거린다.

그걸 위해 그의 눈길이 자식들의 얼굴처럼 생긴

노변의 햇수박 쪽으로도 자주 간다.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거기에도 얼룩져 있다.

육교 옆, 미도 백화점의 셔터가 올라가자

큰 유리창에 이내 김씨의 빈 얼굴이 비친다.

때로 밝게 때로 어둡게 때로 앞 모습만

그 숙인 얼굴이 하루종일 유리창에

맑은 유리창 속 아름다운 온갖 상품들 위에

비친다. 밤 11시 철제 셔터가 내려진 후에도

그의 얼굴이 철제 셔터의 위에 완강하게

비친다. 어둡게 또는 새하얗게. 헌 신문지 같은,

또는 은사시나뭇잎 같은, 또는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철제 셔터 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시집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은사시나무의 그늘 같은 얼룩이 진 김씨의 옆얼굴이 철제 셔터 위에 완강하게 새겨져 있다. 시인이 조각가였다면 김씨의 얼굴을 청동에 새겨 이 시대 노동자의 가감 없는 삶을 증거했으리라. 시로 새긴 완강한 조각상이다. 시인 kweon51@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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