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염량세태(炎凉世態)

입력 2014-06-23 07:35:24

1997년 우리나라에서는 축구 국가대표팀 차범근 감독 열풍이 일었었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일본전에서 도쿄대첩이라고 불리는 극적인 승리를 거둔 후, 다른 나라들을 연파하면서 차 감독은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될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때 차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를 할 때마다 "은총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라는 말로 시작을 했었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표팀 감독으로서 인터뷰하는 것인데, 열심히 뛴 선수들과 응원해 준 국민들을 뒤로하고 개인의 종교적 성향을 먼저 드러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PC통신 하이텔에 막 가입했었던 나는 자유게시판에 경기에 졌을 때의 문제도 있고 하니 선수들과 국민들에 대한 격려나 감사의 말을 먼저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글을 올렸었다. 다음날 하이텔에 접속해 보니 엄청난 양의 메일이 와 있었는데 대부분이 "네까짓 게 뭔데 우리 차 감독을 까냐? 차 감독은 지지 않아"라는 말과 함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을 써 놓은 것이었다. 게시판을 보니 내 글이 조회 수 1위가 되어 있었는데, 게시판에도 내 글에 대한 온갖 욕설이 있었다. 아마 그때 평생 먹을 욕의 대부분을 먹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결국 하이텔을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이텔을 탈퇴한 며칠 뒤 도올 김용옥 교수는 한 일간지에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셨다'는 제목으로 차 감독이 경기 중 기도하는 것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당연히 대한민국에서 똑똑한 것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분도 욕을 많이 먹었다.

그 정도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던 차 감독은 막상 월드컵에 나가서 멕시코에 지고,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에 5대0으로 지면서 대회 도중 경질이 되는 최악의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때까지의 모든 찬사가 비난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쉽게 열광하고, 또 금세 차갑게 돌아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속성을 비하적으로 표현할 때 '냄비 근성'이라고들 한다. '냄비 근성'이라는 말은 자기 비하적인 의미가 강하고 어감도 좋지 않기 때문에 비슷한 뜻을 가진 사자성어인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로 대체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말은 뜨겁다가 차가워지는 세태, 즉 권세가 있으면 온갖 찬사를 보내다가 권세가 떨어지면 푸대접을 하는 일반적인 세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비하적인 면은 약화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대함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맹목에 가깝게 뜨겁다 보니 실패했을 때 실망도 크게 한다.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결할 수 있고,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단 그것은 차가운 비판을 수용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을 때 장점이 될 수 있다.

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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