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通] 공공 의료기관 지켜온 의사 권영재 씨

입력 2014-06-21 08:00:00

"사명감이라고요? 하하∼ 살다보니 그리 된 거죠"

권영재 원장은 문학을 좋아한다. 그는 서재에 꽂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가리키며
권영재 원장은 문학을 좋아한다. 그는 서재에 꽂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가리키며 "그의 작품 중 '도련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특히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권영재 (68) 미주병원 진료원장의 삶은 외로웠다. 서울에서 의대를 졸업한 뒤 고향 대구로 내려왔고, 대구정신병원을 시작으로 40년 의사 인생의 대부분을 공공 의료기관에서 보냈다. 세상의 주목을 받지 않는 일이었다. "존경스럽다"는 주변의 칭찬에 그는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사명감이 아니라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털털하게 웃는다. "저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인생의 큰 틀을 만드는 게 맞나 봐요. 이태석 신부님처럼 고매한 사상도 없고, 안철수 씨 같은 봉사 정신도 없어요. 그냥 조물주의 뜻에 따라 내 인생이 이렇게 온 겁니다."

◆ 공공병원 외길인생

대구 달서구 미주병원에서 만난 권 원장은 시종일관 유쾌했다. "우리 환자들하고 인사할래요?" 질문과 동시에 권 원장이 4층 병동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병원에서는 정신질환자와 알코올 중독자들이 주로 치료를 받고 있다. 그의 일상은 매일 아침 9시 병동을 돌며 환자 상태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된다. 기자 생활을 하며 정신질환자들을 처음 대면했는데 무섭지 않았다. 무섭다는 것은 편견이다. 한 환자가 카메라를 든 취재진을 보며 "어떻게 포즈를 취할까?"라고 물으며 농담을 건넨다.

권 원장을 3년간 지켜봤다는 병동 간호사는 "환자들을 아버지, 형처럼 대한다"고 귀띔했다. "저 환자가 처음 병원에 왔을 때 계속 환청이 들리고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처음엔 아주 애를 먹었다. 겉은 밝아 보여도 문제가 있으면 잘 터놓지 않는다." 권 원장은 환자 성격까지 꿰고 있었다. 간호사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대로 '어쩌다 보니' 정신과 의사 생활을 한 곳은 대부분 공공 의료기관이었다. 대구정신병원을 시작으로 대구적십자병원, 서부노인전문병원 등 그가 몸담았던 병원은 돈 없고 소외된 환자들이 찾는 곳이었다. 1983년, 화원 교도소 뒤편 대구정신병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할 때 그는 삼십 대 젊은 의사였다. 당시 정부에서 대도시마다 정신질환요양병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대구정신병원도 개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구경북에서 최초로 200 병상의 정신병원을 만드는데 일할 의사가 없었다. 그때 권 원장이 초기 개원 멤버로 합류했고 ,'의무원장'이라는 직함도 받았다.

의무원장이 된 뒤 그는 병원 이름을 '대구정신병원'으로 바꿨다. '대구정신질환요양병원'이라는 이름이 너무 길고 유치했기 때문이란다. 처음 입원 환자는 총 200명, 의사는 권 원장 혼자였다. 전체 환자를 다 보는 데 꼬박 4일이 걸렸다. 몸은 힘들어도 일은 재밌게 했다. 회진을 돌고 난 뒤 환자들을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 체조를 시켰고, 체조 시간 도망가는 환자들을 보며 '도주 방지법'을 연구했다. 권 원장은 "요즘 같으면 환자들이 도망갈까 봐 체조 시간을 없앴을 것 같은데 그때 나는 의욕적이고 고집이 있었다"고 껄껄 웃었다.

◆ "진심은 통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엄격한 규율이 아니라 '정'이다. 그는 법을 많이 어겼다. 그 무렵 정신과 질환을 앓는 환자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법원에서 치료감호를 판결하는 제도가 제정됐다. 사람을 죽이고, 방화를 저지른 '치료감호 환자'들이 이곳에 왔다. 법무부는 이 환자들을 창살 있는 방에 가두고, 환자복에도 번호를 적어 일반 환자와 구별하라고 지시했으나 권 원장은 이 지침을 어겼다. "외로운 용단이었어요. 며칠만 있다가 집에 갈 환자들도 아니고 이 사람들을 죄수 취급할 수는 없었어요. 환자복에 죄수 번호도 안 적었고, 일반 환자들과 같은 방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나중에 이 환자들도 고맙게 생각하고 내 말을 잘 들어줬어요. 인간은 정을 주면 배신을 안 해요."

7년간 일했던 병원을 떠난 뒤 인연이 닿은 곳은 대구적십자병원이었다. 적십자사로부터 "병원에 정신과를 개설해달라"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이다. 이곳에서 7년간 일하며 굵직한 일도 많이 했지만 권 원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이주노동자 일요일 무료 진료'를 꼽았다. 6년간 이어온 뚝심 있는 봉사였다. 불법 체류 이주 노동자 진료를 놓고 본사와 작은 갈등도 있었으나 권 원장은 공공 의료기관의 철학을 내세웠다. "적십자병원은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병원이었어요. 적자를 크게 내서도 안 되지만 돈을 많이 남겨서도 안 되는 것이 공공 의료기관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료 진료를 시작하자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잇따랐다. 대구시의사회가 약값을 댔고, 적십자병원 직원들도 당직을 돌면서 봉사했다. 또 임금이 체불된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목사들과 변호사들이 찾아왔고, 적십자사 어머니 봉사단은 밥을 지어 노동자들의 배를 채워줬다. 남을 도우려 시작한 일이었지만 권 원장은 오히려 얻은 것이 많다고 말한다. "적십자 바자회 같이 멋있는 봉사 모임 주인공은 고관들의 부인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초라한 모임에는 살기가 빠듯한 부녀 봉사자들이 나왔어요. 이분들이 무료 진료에 보태라고 걷어준 돈 10만원은 1천만원보다 더 큰돈이었습니다."

◆ 세상을 움직이는 민초들

무료 진료소에서 젊은 의학도들을 만나며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경북대와 영남대 의대 봉사 동아리 학생들은 시험 기간에도 진료소에 나와 묵묵히 봉사했다. 그는 "의학도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얍삽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의학 꿈나무들을 만났고, 희망을 봤다"며 웃었다.

편견을 넘은 또 다른 계기는 북한에서였다. 인터뷰 도중 그가 서랍에서 배지를 꺼내 내밀었다. "맨 위에 있는 이거 달고 북한에 갔다 왔어요." 태극기와 적십자 마크가 달린 '남측'의 배지였다. 2006년 6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남측 적십자 대표의 자격으로 권 원장도 북한 땅을 밟았다. 그때 함께 식사를 한 북측 관계자 중 신문기자와 정보부 사람이 있었다. 신문기자는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대구에 가봤다. 팔공산과 동화사도 안다"며 대화의 물꼬를 텄고, '맞벌이 가정의 월급 관리법'등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나중에는 정보부 사람과 친해져 사진도 함께 찍었다. 우정은 이렇게 싹텄다. "생각의 벽이 높았어요. 군 생활을 하며 (북한은) 항상 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 이게 민족이구나' 그런 감정이 가슴을 쳤어요. 떠날 때 정보부 사람한테 이메일 주소를 묻고 싶었는데 꾹 참았어요. 하하."

의욕 넘쳤던 삼십 대 의사는 이제 일흔을 바라본다. 세월이 흘러도 환자 곁을 지키는 그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그는 올해 1월 '정신과 의사 권영재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책을 펴냈다. 원래 다른 제목을 달 예정이었지만 출판 마지막에 책 제목을 바꿨다. 이 책은 여기저기 숨어서 제 역할을 다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민초들이에요." 맞다. 그도 민초의 삶을 살았고, 권 원장도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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