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 과제/시험/퀴즈를 위해 주위의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음을 서약합니다." '플레지'(Pledge)라 불리는 이 서약문은 미국 교환학생 시절, 달달 외우고 있어야 하는 문장이었다. 대충 외워서도 안 됐다. 철자 하나 틀리지 않아야 했고 마지막에 서명까지 잊어서는 안 됐다. "우리 학교에서는 서약하지 않은 과제물은 모두 무효처리 합니다." 미국인 교수님은 엄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경고했다.
손톱 밑 가시가 따로 없었다. '참 유난스럽네, 이 나라 사람들' 속으로 비웃었다. 큰 시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수업시간 짬을 내서 치르는 퀴즈에도 서약해야 한다니. 콧방귀가 나왔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화근이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제출할 에세이 과제를 매번 교내 '튜터링 센터'에서 첨삭을 받았다. 엄연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지만 기계적으로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습니다'라고 서약을 했던 것이다. 튜터링 센터의 명단을 확인한 교수님께서는 나를 연구실로 부르셨다.
늦었다고 생각한 때는 정말 늦은 뒤였다. '과제는 무효처리되나? 이 과목은 F인가? 다른 처벌은 없나?' 끔찍한 상상들이 이어졌다. 비웃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교수님께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교수님은 뜻밖에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말씀하셨다. "너희 나라와 문화가 다르다는 것 다 이해해. 유난히 한국 학생들이 서약하는 것을 잘 잊더라고. 문화적 차이는 이해하지만 네 생각은 스스로 지켜야 해. 다른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로 지켜져야 하고. 한국 학생들은 한 번 경험한 후로는 잘했으니까 너도 걱정은 안 할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문화적 차이다' '아직 이 나라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는 말로 변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면담 후 이 변명은 나 말고도 이미 많은 한국 학생들이 준비했던 '멘트'임이 드러났다. 결국 "한국은 지식재산권을 보호하지 않아도 무방한 나라예요!"라고 소리치는 셈이었다. 사소한 문서에도 서약하는 미국인을 어리석게 생각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서약문은 손톱 밑 가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베낄 때 양심을 찌르는 가시였다.
굳이 경험을 하지 않아도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남의 생각을 훔치는 '표절'이 그중 하나다. 내가 있던 미국의 한 작은 학교에 다녀간 한국인 교환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유명가수 앨범에서부터 저명한 인사들의 논문에 이르기까지 표절 시비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교환학생들처럼 한 번 경험하고 배운다면 다행이다. 계속해서 사회적 이슈가 됨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는 '표절 문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얼마나 더 경험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도 '서약문 외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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