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으로 다가 온 새터민] (중)지역 새터민들 중 성공 정착 사례

입력 2014-06-13 11:03:26

"양부모님, 남편, 간호사 생활…南에서 새로 찾은 행복"

탈북 이후 정착지를 대구로 택해 달서구 감삼동의 광장꽃집 수양딸이 된 김나윤 씨(오른쪽)와 제2의 어머니가 된 꽃집 주인 최성옥 씨.
탈북 이후 정착지를 대구로 택해 달서구 감삼동의 광장꽃집 수양딸이 된 김나윤 씨(오른쪽)와 제2의 어머니가 된 꽃집 주인 최성옥 씨.
북한에서 평양 모란봉 구역 려맹(여성연맹) 위원장까지 맡은 엘리트 여성 정희숙 씨. 대구에 정착한 그는 새터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불린다.
북한에서 평양 모란봉 구역 려맹(여성연맹) 위원장까지 맡은 엘리트 여성 정희숙 씨. 대구에 정착한 그는 새터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불린다.
탈북 여성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이끈 새암누리 통일예술단장 방소연 씨. 그는 문화예술계 탈북 여성들의 대모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탈북 여성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이끈 새암누리 통일예술단장 방소연 씨. 그는 문화예술계 탈북 여성들의 대모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새터민들의 명(明)과 암(暗)은 분명했다. 정부가 지원해 탈북민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뒷받침하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적응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목돈에 대한 유혹 때문에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이들도 많지만 대체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역 새터민들 중에도 성공적인 정착생활을 하고 있는 사례가 많다. 제대로 된 직장을 갖거나, 결혼해서 잘살고 있는 경우다. 탈북여성 10여 명이 모여서 예술단을 만들어,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활동하고 있는 모범적인 사례도 있다. 탈북민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 그리고 돈에 대한 유혹 때문에 힘들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는 3명의 새터민을 만났다.

#1. 대구 수양딸이 된 김나윤 씨

'남남북녀'(南南北女)라는 말처럼 북에서 온 미녀형 얼굴을 가진 김나윤(32) 씨는 대구에 정착한 새터민 중에 가장 모범적인 정착사례 중 하나다. 2007년 탈북, 2008년에 한국으로 들어온 김 씨는 정착지로 대구를 선택했다. 우연히 선택한 정착지 대구는 이제 고향이 됐다. 동네 사람들도 나윤 씨를 대구 여자로 여길 정도다. 두뇌도 명석해, 남한 문화에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있다.

탈북 담당 경찰과의 좋은 인연은 나윤 씨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구에도 부모가 생기게 된 것. 대구지방경찰청 김종식 보안팀장은 나윤 씨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달서구 감삼동에서 '광장꽃집'을 운영하고 있는 라영주'최성옥 씨 부부에게 소개해줬다. 솔선수범해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있는 이 부부는 김 씨를 수양딸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부모 이상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새터민 김 씨를 '꽃집 딸'로 생각하고 있다.

북한 양강도 김정숙군에서 '김옥'으로 살았던 여성이 탈북 이후에 대구시 달서구 감삼동의 꽃집 딸 '김나윤'으로 제2의 인생 스토리를 써나가고 있다. 나윤 씨는 현재 달서구의 한 한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지난해 4월 결혼에도 골인했다. 현재 남편은 성서산업단지에서 일하는 성실한 회사원이다.

북에서 노동당 간부였던 아버지를 두고, 1남 5녀 중 막내로 살던 김 씨는 경제적 궁핍보다는 한국사회에 대한 동경 때문에 국경선(압록강 장백현)을 넘었다. 자신의 탈북으로 인해 북한 보위부의 감시를 받는 부모와, 교사를 그만둬야 했던 오빠에게 미안함을 갖고 있지만 후회는 없다.

"북한에 있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처음 한국에 와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지난해까지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자주 보내줬습니다. 하지만 이젠 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북에 있는 가족을 마음에서 멀리하려 해요. 대구에 제2의 부모가 있고, 저를 사랑하는 남편도 있으며, 직장도 있습니다. 지금이 행복해요."

1남1녀를 두고 있지만 새터민 수양딸을 받아들인 라'최 씨 부부는 나윤 씨의 결혼식 때 혼수도 다 해주고, 기꺼이 혼주가 되었다. 김종식 보안팀장은 결혼식에서 삼촌 자격으로 폐백에 참석하기도 했다. 맞벌이 부부로 잘살고 있는 나윤 씨는 지금도 수시로 친정인 '광장꽃집'을 찾고 있다.

#2. 새터민들의 정신적 리더, 정희숙 씨

새터민 정희숙(가명'58) 씨는 북한에 있을 때도 파워엘리트급 여성 리더였다. 김일성대 다음으로 명문대학으로 꼽히는 김책공대 출신으로 군 핵심간부(상좌급)인 부친을 둔 소위 잘나가는 집안의 자녀였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평양 모란봉 구역 려맹(여성연맹) 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1인 독재에 충성했다.

하지만 정 씨는 배전부 기술자로 일하던 남편이 고압 철탑에 감전사하면서 북한사회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남편의 목숨은 개죽음이 된 셈이다.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중이었다. 정신적'경제적으로 힘들어하던 당시 그는 중국에 있던 오빠의 얘기를 듣고, '한국에 가면 잘살 수 있다'는 얘기에 솔깃했다.

"사실 아버지는 북한군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어서 혜택이 많았지만, 출신'성분이 좋지 못한 남편과 결혼한 이후로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평양에서 추방된 후 탈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남편 죽음 이후, 어떤 체제에서 살든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탈북하다 북송된 이후에는 강제노역장에서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정 씨는 현재 대구 수성구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잘 살고 있다. 북한에 딸 2명을 두고 와 늘 마음 한쪽이 아리지만, 목숨을 건 탈북과정에서 만난 조선족 남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희망은 새록새록 싹트고 있다. 남편과 아들이 열심히 일해 저축도 많이 했고, 올해 11월에는 35평 규모의 신규 아파트 입주도 앞두고 있다.

북한에서 엘리트 여성이었던 그는 대구에서도 새터민들의 정신적 리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각종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 이전에 새터민들이 먼저 솔선수범해 모범을 보이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평소에도 새터민 관련 민원 처리를 도우며, 그들의 어려움을 상담해주고 있다. 더불어 쓰레기 분리수거 등 각종 생활총화(북한식 말로 일상사의 일을 반성하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정 씨는 단호하게 말한다. "대한민국의 탈북민 지원책도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들을 더 도와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불평'불만을 늘어놓기보다는 정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변 이웃이나 지인들부터 좋은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3. 새암누리 통일예술단장 방소연 씨

2008년에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방소연(52) 씨는 음지의 탈북민들을 양지로 끌어낸 선구자다. 지역 탈북민들의 대모 역할도 잘 수행하고 있다.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1947년 4월 월북하여 1969년 8월 북한 당국에 의해 숙청당함) 무용단에서 사사받은 방 씨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살려 대구에서 '새암누리 통일예술단'을 창단했다. 더불어 지역사회 곳곳에서 예술봉사 및 교류 활동을 하고 있다. '새암누리'는 순우리말로 바위에서 샘솟는 맑은 물처럼 세상을 밝고 맑게 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방 씨를 중심으로 한 이 단체는 '무용'이라는 키워드로 뭉쳤다. 쟁강춤(부채를 가지고 귀신을 쫓는 내용의 전통 북한 무용)과 사당춤(천도재 등을 올릴 때 췄던 최승희의 무용)은 새암누리 통일예술단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춤이기도 하다.

예술단장이자 안보 강사로도 맹활약을 하고 있는 방 씨는 행사비, 강의료 등 개인적으로 번 수익을 모두 투자해 탈북 여성들의 문화예술단체를 만들었다. 현재는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등록돼 있지만 앞으로는 사회적 기업으로 키울 계획이다. 지난달에는 대구시로부터 지역의 법정기부단체로 인증받아 앞으로 후원기업 및 단체'개인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부터는 여성단체 국제소롭티미스트를 비롯해 상이군경회, 민주평통 등 지역의 각종 행사에도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고 있다.

"북한에서 나름 잘나가는 무용수였습니다. 중국 출장 중에 우연히 시청했던 대한민국 TV방송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남한에서 자유롭게 문화활동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많은 고민 끝에 탈북을 결행했습니다. 그리고 대구로 오게 됐죠. 대구가 좋아요. 무뚝뚝한 것 같아도 속이 깊어요. 많은 사람들이 도와줘서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대구에서 태동한 탈북여성들의 예술단체인 새암누리에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한편 새암누리 통일예술단은 방 단장을 중심으로 문란영 부단장, 문가람 사무국장, 장써니 총괄팀장, 김시내 내부실장, 최다인 성악팀장, 이봄'소미'정아현'임현아'김윤아 단원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단원 중에는 북한에서 타워크레인을 다룬 경력자도 있고, 당 선전부에서 일한 당원도 있다.

기획취재팀 권성훈 기자 cdrom@msnet.co.kr

사진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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