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주말, 리모컨을 손에 들고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한 화면에서 손이 멈췄다. 사람 무릎쯤 닿을 정도의 나지막한 키, 동그란 체구 때문에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와 귀염성 있는 동그란 눈을 갖춘 존재. 바로 펭귄이 텔레비전 화면에 잡혔기 때문이다. 그 프로그램은 미국 플로리다 주 샌디에이고의 시월드에 머물게 될 펭귄들의 거주지를 만드는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였다.
그래서 내가 보기 시작했을 즈음엔 조금은 협소해 보이는 공간에서 꽤 많은 펭귄이 아장거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새로운 거주지가 완성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머무르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거대하면서도 웅장한, 동시에 펭귄들의 습성을 고려한 새 거주지의 모습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자연의 빙하와, 바위의 모습을 본떠 섬세하게 제작한 인공구조물뿐만 아니라 펭귄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적절한 온도와 청정한 공기를 유지하는 등 실제 자연과 흡사한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펭귄들이 드디어 새 거주지로 이주했고 잘 적응한 펭귄들은 즐거워 보였다. 방문객들은 펭귄을 만나는 것에 대해 들떴고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펭귄의 거주지를 설계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이었던 '펭귄의 습성'에 적합한 곳임을 알려주듯 시월드의 펭귄들은 야생에서만 볼 수 있다는 물속을 무리지어 헤엄쳐다니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그만큼 새 거주지가 넓기도 했지만 아마도 조성된 주위 환경이 펭귄들이 가진 야생의 본능을 일깨워줬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져 평소엔 잊고 지내지만, 우리 집 고양이들에게도 펭귄과 같은 그들만의 '습성'과 '야생성'이 있다. 대표적인 모습을 꼽는다면 새벽잠이 없다거나, 본능적으로 모래를 파고 볼일을 본다거나, 웬만큼 몸이 아파도 아픈 티를 내려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 있다. 앨리샤의 경우엔 아프면 더 엄살 부리고 신경질까지 내며 아픈 티를 팍팍 내는 등 야생성이 사라진 집고양이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체셔의 경우엔 고양이의 습성에 가까운 모습을 더 자주 보여주는 편이다.
앨리샤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길 때면 체셔는 우리가 발견하기 전까진 티도 내지 않았으며, 예전에 집에서 털을 자르다 꽤 큰 상처가 났을 때도 녀석은 아픈 티를 별로 내지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고양이 습성들은 '고양이니까'라며 넘어간다. 온 집이 떠나가라 벅벅 긁으며 화장실 모래를 끌어 덮을 때도, 새벽 서너 시에 우당탕거리며 온 집안을 뛰어다녀도, 사람이 아닌 고양이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사실 체셔의 습성 중에 새벽 두세 시부터 일어나서 가족들을 깨우는 행동은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단순히 야행성이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매번 꿋꿋하게 가족들을 일어나라며 깨우는 모습은 어쩌면 단순히 습성이라기보단 무언가 체셔의 특기에 가깝기도 했지만 말이다.
시월드의 건설 과정을 지켜보며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온도'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시월드 속 펭귄들의 낙원'을 짓기를 원하기도 했지만 찾아온 사람들이 펭귄들의 공간을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하나로 뜨거운 바깥 온도와 내부 온도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온도 조절을 세밀하게 신경 썼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단계적으로 온도가 내려가도록 한 것이다.
이를 보며 우리 집에서도 온도는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단계적 조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8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체셔는 조금씩 새벽에 우리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고, 우리는 적당히 체셔를 달래주는 법을 배웠다. 서로 의식한 것도 아니고,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점차 단계적으로 양보해가며, 변해가며 서로에게 맞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를 좀 더 받아들이는, 서로 함께하는 삶을 위해서 말이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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