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올 때 정리하지 못한 화분 몇 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더니 잎이 누렇게 말라 있다. 난 촉을 나누며 화분 늘리던 것을 좋아했던 남편도 요즘 들어서는 난이 시드는 것조차 모를 만큼 무뎌졌다. 아파트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화초들이 시골에 와서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눈 돌리는 곳마다 식물들이 지천이고 보니 화초에 기울이던 우리의 애착이 사라진 탓이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이 소중한 시절이 있었다. 시들어가는 화초를 살리려고 뒷산으로 올라가 이끼를 뜯고 소나무 아래를 파서 흙을 담아오던 정성도 있었다. 빈 화분으로 저 혼자 날아와서 싹을 틔운 잡초 하나에도 놀라워하며 감동하던 그런 날들이었다. 하지만 식물들은 그대로인데 그들을 바라보는 남편과 내가 변해버렸다. 사람의 입에 들어갈 수 없는 식물들은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간 것이다.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하며 닮고자 했던 우리가 이제는 같은 이유로 원망하며 뽑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올해는 작년처럼 잡초에게 밭을 내주는 대신 누가 보더라도 말끔한 텃밭을 만들어보자고 마음먹었다. 우리가 원하는 작물만이 가지런히 자라는 텃밭을 보는 일과 거기에서 수확한 것으로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채울 생각을 하면 즐거워진다. 시장에 나가서 김매기용 작업의자와 여분의 반코팅 목장갑, 선 스프레이를 일찌감치 준비한 까닭이다.
우리 밭에서 눈에 띄는 잡초는 비름나물과 질경이, 바랭이, 명아주, 환삼덩굴 등이다. 처음에는 심지도 않은 비름나물이 밭에 나 있기에 무척 좋아했었다. 어린 비름나물을 뜯어 무쳐먹으면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는 식감이 입맛을 돋우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름나물은 비름나무가 되어 밭을 점령해버렸다. 질경이를 봤을 때도 효소를 만들 수 있는 풀이라고 좋아했었다. 하지만 여린 싹으로만 보이던 질경이 역시 원래부터 자신들의 터전인 듯 작물을 밀어내고 밭을 차지해 버린다. 다른 풀들도 마찬가지였다.
현명한 농부는 잡초가 꽃을 피우기 전에 뽑아버려야 한다는 걸 안다. 잡초의 씨가 땅에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사에 초보인 내가 작물과 잡초의 어린 싹을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잡초들은 작물과 비슷한 모습으로 자란다. 쑥갓 밭에는 쑥갓을 닮은 풀이 자라고 부추 밭에는 부추를 닮은 풀이 자란다. 마늘밭에도 마늘을 쏙 빼닮은 잡초가 자라고 있다. 어느 정도 작물이 자란 뒤에는 잡초를 구분할 수 있지만, 이때쯤이면 잡초의 뿌리가 벌써 흙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에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 잡초인 줄 알고 호미질을 하고 나면 이제 간신히 알을 맺어가던 마늘이 뽑힐 때가 허다하다.
풀을 뽑기 위해 밭고랑에 앉으면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로 시작되는 노래가 떠오른다. 그 아낙네가 섧게 운 이유는 콩 포기를 세며 남모를 사연을 되새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애꿎은 풀의 사연을 호미로 들추며 마음 언짢아한다. 사람이 기르면 작물이 되고 제 스스로 나서 자라면 잡초라 불린다. 나고 자라는 일은 같은데 쓰임에 따라 자리가 달라지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날이 더워져서 며칠 한눈을 파는 사이 크지도 않은 밭에서 풀들이 또 잔치를 벌였다. 내가 뽑아낼 때마다 그보다 더 많은 풀이 싹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김매기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니 이제 막 퍼지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밭으로 쏟아진다.
작물과 잡초가 뒤섞인 밭은 그 어떤 구분도 없이 똑같은 초록색으로 반짝거렸다. 애초에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적 없다는 듯 자연의 모습 그대로다. 내년에는 작물이 자라지 않는 빈 땅 모두를 비닐이든 신문지든 현수막이든 가리지 않고 멀칭(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땅을 덮는 일)을 해야겠다는 절실함이 현기증과 함께 밀려온다.
배경애(귀촌 2년 차·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