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어느 의사의 하루

입력 2014-06-10 10:34:04

오전 8시 20분! "시작하자"란 내 말에 진료실 문이 열리고 한 환자가 고개를 내민다. 허리가 아파 전라도 곡성에서 여기까지 오신 할머니다. 어제 대구에 도착해서 하룻밤 주무시고 새벽에 맨 먼저 병원으로 와서 여태껏 기다리다 이제서야 진료를 보게 되었단다. 죄송한 마음이 든다. "좀 어떠세요?" 란 내 말에 "많이 좋아졌당께!" 하고 환하게 웃으신다. 내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첫 환자를 기분 좋게 봐서 오늘은 순조로운 하루가 예상된다. 오전 환자가 좀 많은 편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짧은 내 소중한 점심시간이 없어질 판이다. 이런저런 환자를 진료하다 보니 벌써 9시 20분! 중간 중간에 시술이 있어서 그런지 진료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15명밖에 환자를 못 봤다. 이런 속도라면 오후 진료가 시작되는 2시까지도 오전 환자를 다 못 볼 판이다.

그런데 아뿔싸! 속이 부글거리면서 뱃속에서 요동을 친다. 어제저녁에 먹은 생선회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랫배가 아프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화장실에 달려가야 하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5분 이상을 소요해야 한다. 일단 방사선 차폐용 납가운을 벗어야 하고, 오른손에 10겹 이상 낀 납장갑을 하나하나 벗어야 하고(빨리 납장갑을 벗다 찢어지기라도 하면 낭패다. 왜냐면 납장갑은 무지 비싸다.) 볼일 보고 나면 반대로 납장갑을 하나하나 끼고 납가운을 입고 고글을 껴야 다시 환자 진료를 볼 수 있다. 진료 보러 왔다 갔다 하는 내 걸음걸이가 점점 힘들어진다.

결국 환자 3명을 더 진료하고 화장실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6분이 소요됐다. 다 내 잘못이다. 이런 생리현상들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다 해결해 놓고 왔어야 했다. 잃어버린 6분을 만회하기 위해서 더 빨리 뛰어다녀야 한다. 정신없이 진료를 보는데 진동으로 해둔 내 핸드폰이 울린다. 지인인데 승마하다 낙마했단다. 일단 허리 MRI를 찍어 보는 게 좋겠다고 오라고 했다. 이번엔 힙합댄스를 하는 여고생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왼 발목 인대가 찢어졌는데 대회가 낼 모레란다. 대학입시용 대회라 꼭 참가해야 한다고 해서 임시로 치료하고 대회 후에 보자고 했다. "발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꼭 입상하거래이" 하고 한마디 해 준다.

낙마한 지인이 도착했다. MRI 검사 결과 12번째 흉추와 첫 번째 요추에 미세한 압박골절이 발생했다. "입원 안 하고 치료만 해도 되니 너무 걱정 마세요" 하고 환자를 안심시키고 이런저런 치료를 하고 돌려보냈다. 오전 접수 환자 진료를 다 마치니 오후 1시 45분이다. 밥 먹기도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그냥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한다. 사실 급하게 점심을 먹고 오후 진료를 하면 식곤증 때문에 피곤해지기 십상이다.

오후 2시 잠을 깨우는 알람 소리에 진료실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이 무겁다. 환자 수를 보니 오후 진료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10분씩이나(?) 걸리는 허리 시술도 2건이나 예약되어 있다. 막상 오후 진료를 시작하니까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사라진다. 진료 보는 속도도 점점 빨라진다. 벌써 오후 4시! 건장한 체격에 범상치 않은(?) 외모의 아저씨 환자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면서 왔다. 침대에 엎드린 순간 나는 멈칫한다. 등 전체에 울긋불긋 용 한 마리가 몸을 휘감고 있다. 주사가 아파서 내게 뭐라고 할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용 꼬리와 발톱 부분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고 치료제를 투여한다. 도망치듯이 얼른 치료실을 나오면서 한마디 한다. "오늘 치료받으시고 안 아프면 오지 마세요."

어느덧 마지막 환자다. 손목 인대 치료받는 환자인데 유난히 주사를 못 맞아서 치료 때마다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친다. "독립 운동한 유관순 누나라도 이 주사 맞으면 다 불고 말거야"란다. 마치 내가 일제시대 독립투사를 고문하는 일본순사가 된 기분이다.

오늘 하루는 비교적 순조롭게 지나갔다. 안 낫는다고 시비 거는 환자도 없었고 치료받고 좋아졌다는 환자가 많아서 기분이 좋다. 귀가하는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맛있는 저녁식사와 소주 한 잔으로 오늘 하루의 피로를 풀어야지 하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렇게 살아온 날이 12년 하고도 5개월이 흘렀다.

백승희/사랑모아 통증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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