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하이힐…완벽한 형사 의혹의 여인 숨겨진 진실은?

입력 2014-06-05 09:01:27

나쁜 형사들의 악행에 대항하는 보통사람들의 투쟁기를 그린 액션영화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끝까지 간다'와 '표적'은 칸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국내 흥행에도 청신호를 보여주고 있다. 공적 기관의 부패와 무능함에 진저리가 쳐질 무렵, 보통사람이 공권력에 맞서는 강렬한 액션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현실을 도저히 어찌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두드려 패고 맞고 폭발하는 액션, 스릴러, 누아르, 갱스터영화의 사회적 기능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번 주 개봉하는 또 하나의 한국 누아르 영화는 애처로운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다. 제목 '하이힐'.

'감성 누아르'란 카피를 붙인 '하이힐'은 포스터 사진처럼 비장하고 비애감이 넘치는 쓸쓸한 도시 신파일까. 그건 아니다. 이 영화의 정체를 설명해줄 키워드는 '장진', '누아르', '성 정체성'이다. 장진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으로 인해 이 액션 누아르는 묘하게 균열을 일으킨다. 우아하고 비장한 척하지만 유머가 빈틈을 헤집고 기어 나온다. 한바탕 잔인한 액션 신이 불러일으키는 감성은 두려움을 자아내기보다는, 과잉 표현으로 만들어진 기이하고 낯선 공기를 음미하게 한다.

완벽한 남자의 조건을 모두 갖춘 강력계 형사 지욱(차승원)은 범인을 단숨에 제압하는 타고난 능력을 발휘해 경찰은 물론 거대 범죄 조직 사이에서도 전설적인 존재로 불린다. 지욱은 내면 깊숙이 자리한 여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감추기 위해 더욱 거친 남자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진짜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 위한 새로운 삶을 준비하지만, 그의 주위에 도사린 장애물들은 그를 움츠러들게 한다.

가련한 형사 주인공은 팜므파탈이나 절대악으로 인해 파멸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자신 내부의 문제로 인해 비극으로 떨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여성 성을 감추기 위해 더욱 더 마초적인 남성 성을 위장한다. 몸은 근육으로 단련되어 있고, 어마어마한 액션 내공을 갖추었으며, 온몸은 상처투성이다.

영화는 기존의 액션 주인공이 고통스러운 단련의 시기를 거친 후 진정한 영웅이 되는 서사를 비튼다. '하이힐'의 영웅은 육체를 단련하면 할수록 자신의 진실한 자아와 괴리를 두며 더욱 고난에 괴로워하는 모순을 일으킨다.

원래 '누아르'는 범죄 스릴러나 갱스터 영화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는데, 특유의 비장미 넘치는 스타일로 인해 영화가 한결 멋스러워진다. 어두운 도시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개입하는 형사는 외로운 존재이며, 영웅적이지 않은 혼란스러운 존재인 주인공은 폭력과 부조리로 점철된 사회의 편집증을 대변한다. 여기에 의혹의 그림자가 가득한 여인 팜므파탈의 출현은 이야기를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리며, 출구가 없는 현대사회의 실존주의적 모티프로 작용한다.

'장진'은 '기막힌 사내들'로 데뷔 후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등을 연출했으며 '하이힐'은 그의 11번째 연출작이다. TV 코미디쇼 및 연극까지 코미디에서 장기를 발휘한 장진 감독은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면서도, 예의 그의 코미디 감수성을 버리지 않고 곳곳에 버무려 넣는다.

'결국, 내 안의 그녀가 죽었다'라는 메인 카피는 주인공 형사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암시적인 의미가 된다. 영화는 고독하고 소외된 목적 없는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절대악, 그리고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의 구도를 깨뜨리고, 주인공 내부에 자리한 다양한 자아의 충돌을 그려내며, 현실 사회의 소수자의 문제를 건드린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움의 누아르 옷을 입은 이 영화는 "한 인간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통해 아픔과 슬픔, 분노까지 담아낸 짙은 페이소스를 선사한다"고 감독이 밝히지만, 슬픔과 연민보다는 묘하게 풍겨 나오는 아이러니로 인해 즐거워지는 오락적 성격이 더 강하다.

누군가의 비극을 구경하게 하는 상업영화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돌파해내는 유머감각을 통해, 말하기 힘든 사회의 주변부 모습을 건강하게 주류로 끌어올린다고 생각한다.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오가는 유려한 배우 차승원의 캐릭터를 활용한 영리한 전략은 이번에 성공한 듯 보인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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