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노무현 기록' 제 존재의 이유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5주기를 맞이한 이달 23일 봉하마을을 다시 찾은 윤태영(53)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의 묘소에 한 권을 헌정했다.
"가슴에 응어리로 맺혀 있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라도 그에 대한 자책감을 덜어내려는 노력이다. 내가 자유로워져야 조금 더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그를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나에게 준 과분한 사랑,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과 글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제대로 보답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는 여전히 그리운 사람이다. 힘겨운 정국 상황에서도 비서의 아침 첫 인사에 활짝 웃으며 화답하던 표정, 기자와의 산행 약속시간에 늦자 모자를 쓴 채 관저의 복도를 성큼성큼 뛰던 모습, 비서들의 무거운 분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린 상쾌한 휘파람 소리, 언젠가 순방국의 휘황찬란한 궁전 내부를 보다가 잎이 큰 화초를 목격하고는 혼잣말로 '저거 쌈 싸 먹으면 좋겠다'며 은근히 야유를 보내던 유머, 또 다른 나라에서 마주한 엄청난 규모의 호텔 건물 앞에서 '게가 구멍이 크면 죽는다'며 일침을 놓던 특유의 입담, 비서의 잘못에 크게 화를 내며 꾸짖어 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분위기를 풀어주던 그 미소에 이르기까지, 이제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묻으며 놓아 드리려고 한다."
윤태영 비서관이 전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는 비로소 '노무현'이라는 역사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참여정부 5년 내내 청와대에서 연설비서관과 대변인, 제1부속실장, 연설기획비서관, 대변인 등을 역임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관찰자이자 기록자였다.
퇴임한 후에도 노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집필작업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면서 지난 5년간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로 한동안 지샜고 그러다가 마침내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실려가 사경을 헤맸다. 중환자실에 실려가면서 그는 "대통령님이 맡긴 작업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대통령님 얼굴을 뵙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며 병원문을 나서는 즉시 마무리하지 못한 노 전 대통령의 비망록 정리와 집필에 나섰다. 은 그렇게 힘겹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 마포의 '노무현 재단'에서 만난 그의 몸과 얼굴은 꽤 상해 있었다. 머리칼은 듬성듬성해졌고 흰 머리도 부쩍 늘었다. 뇌출혈 후유증으로 망가진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날마다 뛰어야 했고 어지럼증과 불면증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책을 쓰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이 되면 그의 꿈에 노 전 대통령이 나타났다. 그는 나중에는 '제발 오늘 밤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도까지 올렸다고 했다.
한 권을 헌정한 후 이제 그의 꿈에 노 전 대통령은 나타나지 않는다. 비로소 그는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놓여난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이 노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국회에 들어와 다른 의원 보좌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이후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노 전 대통령이 라는 책을 펴낼 때 집필 작업을 도와주면서 직접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그가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자 윤 전 대변인도 그의 선거캠프에 들어가면서 운명적인 인연을 이어갔다.
그가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되자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그러나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대변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신뢰를 쌓았다.
"캠프 출신이기는 했지만 노 전 대통령과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저를 대변인 시킨 이유가 의아했다. 제가 사교적이거나 말을 잘하거나 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변인)하면서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듯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신뢰를 더 얻은 것 같다. 또 기자들에게 신뢰를 얻으면서 청와대 내부 신뢰를 굳히게 됐다. 기자들이 신뢰하면 안에서도 무시 못 하더라. 안에서 신뢰를 얻으니까 기자들에게 더 신뢰를 얻어 열심히 취재했다. 그런 것을 인정받아 제1부속실장으로 갔는데 노 전 대통령으로서도 글도 쓰고 언론감각을 익힌 사람을 옆에 두고 기록하라고 데려간 것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청와대 시절의 대통령 메모와 사료를 정리하고 글 쓰는 일로 소일했다. '노무현 재단' 사료센터 본부장 같은 직책을 맡고 있지만 상근은 아니다. 올 초부터 상근하려고 했는데, 지난겨울 다시 몸이 좋지 않아서 잘 나오지 못하고 있다.
뇌출혈 후유증이 좀 있다. 머리가 굉장히 예민해진다든가 두통이 자주 오고 장이나 방광이 과민해진다든가 하는 증상이 있다. 술도 좀 많이 마셨는데 주량이 약해 빨리 취해서 다행스럽게도 몸이 덜 상했던 것 같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자책감에 시달렸다고 들었다.
"노 전 대통령께서 퇴임 후 집필팀을 항상 옆에 두려고 했는데 당시 검찰수사를 집중적으로 받으면서 활동이 정지된 적이 있었다. 그해 5월 중순에 다시 회의를 열었을 때 대통령님이 힘드실 것 같아 '집필팀을 해체합시다. 회고록은 제가 맡아서 할 테니 그동안 해오시던 것은 미래발전연구원에 넘겼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랬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하셨다. 돌아가시고 나서 생각하니 우리가 그 당시의 유일한 말벗이었는데 그냥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들었다. 그 마지막 회의가 돌아가시기 나흘 전인 19일이었다.
그래서 서거 후 한동안 다른 사람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정치적 상황이 어려웠어도 우리가 잘 모셨으면 되는데…."
-은 당초 쓰려던 비망록이 아니다.
"원래는 작업을 하나로 생각했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의 일은 제가 커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재임 시절과 퇴임 후의 기록을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한 권이 되든, 두 권이 되든 간에 엮어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까 다큐멘터리라는 것이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읽히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하나 비망록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노 전 대통령의 '워딩'이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초에는 대통령 서거 후 3, 4년이 지나면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NLL 문제 터졌을 때 보니까, '대연정' 국면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어서 대통령의 말을 내놓으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선거를 앞두고 정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여전히 살아있는 대통령과 다름없었다. 문득문득 뉴스를 보면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논란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정치적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중요한 것을 빼고 책을 내기도 그렇고 이왕 책을 내는 거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하는 욕심과도 충돌했다. 글을 정리하다가 대통령의 리더십과 인간적인 면을 따로 떼서 연재하던 것을 엮은 것이 바로 이다."
-제대로 된 '비망록'은 언제 내놓을 것인가.
"제가 갖고 있는 메모로 원고는 일단 다 정리했다. 제가 퇴임 1년 전 먼저 나와서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보충 취재도 거의 다 했다.
그런데 정책참모가 쓴 비망록과 수행비서 같은 제가 쓰는 것은 다르다. 제 비망록은 시간대별로 따라가는 장점은 있지만 한미 FTA 같은 하나의 쟁점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말만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미국의 입장과 다른 수석과 정부의 입장은 어땠는지 하는 것에 대해 입체적으로 보충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런 작업을 거쳐 많은 사람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5년이 지났으니까 어느 정도 '노무현'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한 단계는 지났다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가 끝나고 정권이 바뀌면서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할 때는 세상에 나오기 싫었다. 대변인이라서 세상에 얼굴이 알려졌지만 잊히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이제는 실제로 거리도 편하게 다닐 수 있다. 한때 머리를 길러서 묶고 다니기도 했다. 책을 출판하면서 이중적인 고민을 했다. 많은 사람이 책을 읽어주기 바라는 마음과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제가 다시 회자하고 얼굴이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임기 말 노 전 대통령께서 수석비서관을 맡으라고 제의한 적도 있었다.
"참여정부가 끝날 때쯤에 '앞으로 무엇을 할까'고민하면서 정치적 기반이 엄청나게 높아져서 '정치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을 살짝 했다. 그러던 차에 노 전 대통령님이 부르셔서 '누가 그러던데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그러지 말고 당신과 함께 봉하에 가서 책 쓰는 일을 하자고 하셨다. 그때는 여러 사람에게 정치하라고 권할 때였다. 나중에 퇴임하고서는 '정치하지 마라'는 글을 쓰기도 하셨지만.
그 말씀을 듣고 어차피 맺어진 운명, 한 시대를 풍미한 대통령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도 정치하는 일 못지않게 큰일이라는 생각으로 정치 생각을 접었다. 수석은 제가 수석급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절했다."
윤 전 대변인은 오는 6월 5일 대구의 노무현 시민학교에 간다. 그곳에서 '노무현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이다. 그에게 '노무현'은 선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옹호도 방어도 변명도 아닌 주어진 숙명이다.
서명수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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