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금요일 밤이었다. 벌써 야간에 출동을 세 차례 나간 터라 조금씩 피곤이 몰려오고 있을 때쯤, 네 번째 출동벨 소리가 들려왔다. "구급출동! 구급출동! ○○동 ○○시장 옆 골목길 쓰러진 아주머니 발견! 구급대 구급출동하세요!"
야간 출근을 하면서 '오늘은 조금도 쉬지 못하겠구나'라고 생각은 했지만 자정도 되기 전 벌써 네 번째 출동이다. 출동을 나가면서 환자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려 신고자에게 전화를 했다. 신고자는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급하게 '119에 신고해 달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고 했다. 나는 이상한 느낌에 구급차 사이렌 소리를 더욱 올리고 아주머니가 쓰러진 현장으로 급히 차를 몰았다. 4분 후 아주머니가 쓰러졌다는 골목길 앞 도로에 정차 후 구급장비를 챙기고 깜깜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쓰러져 있는 아주머니와 그 옆에 비에 젖은 보행기가 멀리서 희미하게 보였다. '응급환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심장박동수는 올라갔지만 이상하게 마음과 머릿속은 점점 차분해지고 맑아졌다.
환자에게 도착한 나는 큰 소리로 아주머니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봤다. 아주머니는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누워 밤에 내리고 있는 봄비를 온몸으로 맞고 계셨다. 119임을 알리고 아주머니 팔뚝에 혈압계를 감고 혈압을 측정 중에 아주머니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누구고? 놔라 이거!"라면서 팔을 뿌리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 입에서 강하게 풍기는 술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했다. 아주머니에게 다시 한번 119구급대원임을 알리고 혈압과 맥박 등 생체징후를 측정해 나갔다. 혈압과 맥박은 정상이었으나 체온이 약간 내려가 있었다. 아마도 몇 시간 동안 비를 맞아서일 거다.
마침내 동료가 환자 운반 장비를 끌고 옆으로 왔다. 난 동료에게 아주머니가 술을 많이 드시고 비를 맞아서 약간 체온이 내려가 있다고 말을 한 뒤 병원으로 옮기자고 하는 찰나 내 동료가 말했다. "어? 이 아주머니 ○○○씨 아냐? ○○동 ○○○○-○○번지에 사는 분인데?" 동료의 말에 따르면 이 아주머니는 이 동네에서는 아주 유명하다고 했다.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길에서 주무시다가 지나가는 분들이 신고해서 출동을 많이 나왔었고 관할 경찰들도 다 안단다. 동료가 얼굴 한 번 보고 이름에다 집 주소까지 외울 정도면 지금 내 옆에 누워있는 이 아주머니, 이 동네에서 정말 유명한가 보다.
술을 많이 마시고 체온이 내려가 있어서 보온조치로 일단 아주머니를 구급차에 옮긴 뒤 이불을 덮고 차량히터를 틀어서 응급처치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아주머니가 살며시 눈을 뜨더니 자기를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참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난 아주머니에게 어디 아프신 데 있느냐고 물어보고 술을 얼마나 드셨느냐고 물어봤다. 아주머니는 갑자기 혀가 꼬인 말투로 나에게 "니가 119면 그냥 집에 데려다 주면 될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야! 너 내가 내는 세금으로 먹고살지? ○○동 ○○○○-○○번지, 됐지? 야! 나 잘 테니까 다 가면 깨워!"
순간 내 가슴속에서 '욱' 하는 그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이 아주머니, 구급차를 타고 자기 집에 간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다. 난 아주머니를 깨우며 비를 많이 맞아 저체온증이 올 수 있으니 병원으로 가자고 설득했으나 나에게 돌아오는 건 아주머니의 술주정과 욕설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주머니 집으로 향했다. 아주머니가 사는 집에 도착해 보니 불은 꺼져 있고 집 앞 대문은 잠겨 있었다. 아주머니에게 대문 열쇠를 달라고 하자 아주머니는 열쇠가 없다고 했다. 동료와 의논 후 하는 수 없이 담을 넘기로 했다. 조심조심 담을 넘어 대문을 연 후에야 아주머니를 방안에 눕힐 수 있었다. 집안을 보고서야 아주머니가 혼자 살고 있고 가족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방안에 전기장판을 켜드리고 나오면서 아주머니에게 술을 마신 후 집에 갈 목적으로 119를 타면 안 된다고 설명을 드리고 내일 아프시면 119에 전화를 달라고 말하고선 뒤돌아 나왔다.
안전센터로 되돌아오는 차 안에서 예전에 내가 처음 임용됐을 때 선배님이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 선배님은 신규 구급대원으로 임용된 나에게 "넌 구급대원으로서 마음속에 '애인'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자 그 선배님이 哀(슬플 애)와 忍(참을 인)이라고 말했다. 구급대원들 마음속에는 哀와 忍자가 아마도 백만 번은 넘게 새겨져 있을 거라고 했는데 오늘 이 아주머니를 보고 그 말뜻을 이해했다. 아주머니가 참 얄밉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외롭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에 내 옷만 젖은 것이 아니라 덩달아 내 마음도 부슬부슬 젖어갔다.
댓글 많은 뉴스
박수현 "카톡 검열이 국민 겁박? 음주단속은 일상생활 검열인가"
'카톡 검열' 논란 일파만파…학자들도 일제히 질타
이재명 "가짜뉴스 유포하다 문제 제기하니 반격…민주주의의 적"
"나훈아 78세, 비열한 노인"…문화평론가 김갑수, 작심 비판
판사 출신 주호영 국회부의장 "원칙은 무조건 불구속 수사…강제 수사 당장 접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