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풀꽃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내 몸속에 있는 모든 세포들의 두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너무 가냘프고 작은 목숨들, 그러나 이 세상 어떤 생명보다도 강하고 치열한 숨결로 피고 또 진다. 풀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내 심연의 깊은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침몰하는 서러움과 만날 때가 있다. 아무도 고개 숙여 보지 않는 풀에 꽃이 달리면 나는 별을 안은 듯 환하게 밝아오는 맑은 인간이 되곤 하였다. 그래서 풀꽃은 내 삶의 반을 나와 함께 있어준 고요한 빛이었다.
캄캄한 보도블록을 차고 올라온 민들레 한 송이를 어쩌지 못해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 담벼락에 기대어 그 철없는 민들레를 오래오래 지켜본 일이 있었다. 누군가의 발자국에 기어이 짓밟히고 말 새봄, 새 생명을 향한 나의 안타까움이었다.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는 꽃, 고개 숙여 무릎 꿇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꽃 그러나 풀꽃은 화려한 장미도 우아한 목련도 요염한 작약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바람 부는 산비탈과 거친 땅도 마다치 않고 쌀알같이 작은 목숨을 내려놓는다. 조심조심 키를 낮추며 가냘픈 목숨을 이어가지만 밟으면 밟을수록 강인한 뿌리와 가녀린 꽃잎 속에 숨어 있는 씨앗으로 다시 피어나는 우리들의 꽃이다. 우리들의 희망이다.
그러나 거친 땅을 헤치며 살아왔던 우리들의 풀은 너무 많은 꽃을 잃었다. 부끄럽게 살지 않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이 땅의 민초들을 부끄럽게 살아있게 한 부패한 세력들 앞에서 나는 소리 내어 또박또박 김수영의 시 '풀'을 다시 읽는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스러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더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생략).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유작으로 알려진 이 시는 어떤 권력의 억압이나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일어서는 풀의 속성, 즉 민초들의 힘을 노래한 시다. 거센 바람에 쓰러져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에 의해 나약해져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웃는 풀의 굳센 의지와 끈질긴 생명력을 일깨우고 있다. 이처럼 험한 세월을 꿋꿋이 버텨온 질긴 민초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나라의 혼미한 안갯속에서 울고 있다. 수백 명의 고귀한 생명을 바닷속에 수장해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떠들고 있는 사고원인의 분석과 해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납득할 만한 확고한 진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수위를 넘어버린 슬픔과 분노 앞에 다시 끌어안아야 하는 불확실한 시대의 불안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범죄 조직의 운전석에 앉아 이 강산 구석구석에 도망 다닐 쥐구멍을 파놓고 있는 능수능란한 조직의 수장을 찾아나선 단죄의 칼을 든 검찰이 대문 앞만 기웃거리다가 돌아와서야 되겠는가! 지금은 수백 명의 목숨이 차갑게 식어갔고 수없는 목숨이 살아있어도 살 수 없는 불덩이를 껴안고 타들어가고 있는데….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엄포만 놓고 있는 소극적인 공권력이 놓쳐버린 또 다른 골든 타임은 없는가?
3천억 원의 부도를 내고 2천억 원을 국민의 세금으로 탕감 받아서 오늘의 세월호를 수장시키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유착의 가능성을 이 나라 모든 국민들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해양경찰청을 해체하고 국가안전처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됐지만 한나라의 질서와 안전은 이런 국가 기관이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진정한 마음을 가진 정신적 지도자가 목마르게 그리울 뿐이다. 더욱더 강해진 5월의 태양 아래 요동치며 자라는 거센 풀들의 분노를 이 나라 모든 관료들은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잃어버린 풀의 꽃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황영숙/시인·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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