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의 집중 인터뷰] 외주사 '김진혁 공작소' 김진혁 대표

입력 2014-05-16 07:17:40

15년 오직 다큐만 팠다…공중파가 믿고 맡기는 '리얼리티'

'김진혁 공작소'는 다큐멘터리만 만드는(工作) 외주 프로덕션이다. 이 공작소의 김진혁 대표는 CEO라기보다는 PD가 더 어울린다. 지난 15년간 다큐멘터리만 제작해서 방송가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원숭이와 함께한 50년, 미토 할머니의 고지마 원숭이 관찰기록'에서부터 '이것이 중국이다' '폭탄의 딸 라오스' '메이드인 차이나, 왜 세계를 제패하나?' '행복해지는 법 2부작' '잘 늙는 법 2부작' '정전 60주년 기념 다큐 푸른 눈의 전사들' 등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60분짜리 다큐멘터리만 75편을 제작, 방송했다.

"우리는 한마디로 다큐멘터리 공장이었다. 냉정하게 말하면 살아나기 위해,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했고 그 다큐멘터리들의 퀄리티가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에 계속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 PD는 1년의 절반을 해외에 나가서 직접 촬영하고, 나머지 절반은 공작소 편집실에서 그림을 편집하는 등 후반작업을 하거나 글을 쓴다.

그는 PD이기 이전에 '행동하는 문화기획자'이자 '카메라를 든 마라톤맨'으로도 불린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연극반 친구들과 함께 신촌에서 카페를 열었을 때 쭈뼛거리며 아무도 무대에 나서지 않을 때 혼자서 앞으로 나가서 '막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웠던 것도 그가 행동하는 문화기획자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 중의 하나다.

"이제는 '선수'가 되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한 컷, 한 컷이 그냥 찍은 것이 아니구나. 저 통찰과 저 스토리가 몇 년이 지나도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런 딱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

그가 요즘 털어놓는 '다큐PD'로서의 꿈이다.

요즘 '김진혁 공작소'는 남미에 가서 KBS 파노라마에서 방송할 '왜 탐험하는가'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MBC에는 '죽을 때까지 젊고 싶은 당신'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EBS 다큐프라임 '공부 못하는 아이들' 5부작도 찍고 있다. 얼마 전에는 SBS 스페셜에도 다큐 한 편을 납품했다. 국내 4대 공중파 방송국 메인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만들어내는 외주 프로덕션은 '김진혁 공작소' 외에는 없을 것이다.

드라마와 연예 프로그램을 연출한, 잘나가는 공중파 방송국 PD로 일하던 그가 마음속 '역마살'을 발현하도록 내몬 것은 1998년 IMF 사태였다. '사진도 조금 찍을 줄 알고, 글도 조금 쓰고, 끼도 조금 있었던' 그가 방송국에서 나오자 그 길로 후배 PD와 '김진혁 공작소'를 차렸다. 그리고는 VJ로 나서 여행 프로그램을 공작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들고 37개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나라를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 직접 방송에 출연했다. VJ로서 꽤 인기를 끌었다. 팬들이 생겼고 팬클럽도 조직됐다.

공중파 방송국이 외주 프로덕션을 '이류'로 취급하면서 차별한 시절도 있었다.

KBS가 지난해 자사 다큐멘터리를 통합, 새롭게 선보인 'KBS 파노라마' 첫 회를 '김진혁 공작소'에 맡긴 것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한 지금까지의 인식을 완전히 불식한 일대 사건과도 같았다.

'공작소'에서 만든 KBS 파노라마 '당신의 몸' 2부작은 각각 8.9%와 10.4%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김 PD는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생생한 '리얼리티'에 있다고 말한다.

"사실 처음에는 잘 몰랐고, 생존을 위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요즘 들어서 조금씩 알게 된 것이 리얼리티다. 이를테면 요즘 노숙자 병원에 가서 1년째 '마지막 병원'(가제)을 찍고 있는데, 그곳에서 1년 동안 계속해서 찍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중 한 분은 당뇨로 눈을 잃었고, 다른 한 분은 인후암 말기다. 그런데 그 병원의 시설이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부럽다'고 했더니 그분이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다. 자신은 3급 거지 정도 되는데 같은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들은 1급 거지라는 거다.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으니 6명이 한 병실에 입원해 있는데 5명이 중증환자라 '똥오줌을 못 가리고 융단폭격한다'는 거다. 워낙 심한 환자들이라 간호사들이 제때 돌보기가 힘들 정도이고, 바로 옆 당뇨환자는 다리가 썩어가고 있는데도 절단을 거부, 썩는 냄새가 지독하다고 했다. 그래서 마스크를 다섯 개나 쓰고 자는 데도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부탁하기를 자신의 휴대폰에 '사진첩'이 있는데 거기에 든 '야동'을 원본은 지우지 말고 없애달라고 몰래 부탁하더라.

그때 느낀 것이 '아, 이런 것이 정말 다큐다'라는 생각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뻔하지가 않다. 정말 리얼한 것이다. 이 병원같이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내 주는, 그런 것이다. 예전에는 잘 몰랐다. 그런 면에서는 다큐는 공감과 소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감하고 이해하는 만큼만 보인다. 그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야동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다큐는 디테일이고 시간싸움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모든 외주 프로덕션이 김진혁 공작소 같지는 않다. 공작소처럼 운영하다가는 굶어 죽거나 망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외에도 프로덕션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되는 많은 일들을 따내야 한다.

김 PD는 공작소의 생존 비법에 대해 "외주 프로덕션이 퀄리티있는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는 여건으로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효율성을 극도로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제작비가 5천만원 책정돼 있다면 방송국에서 자체 제작한다면 그 비용을 제대로 잘 쓰면 되지만 우리는 돈을 남겨야 한다. 그래야 다음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다. 그리고 퀄리티를 유지해야 한다. 그 방법은 효율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열흘을 찍어야 한다면 일주일 내에 마치는 것이 생존의 비법이다."

공작소의 또 다른 생존비법은 다큐 지원기관의 각종 공모다. 우리나라에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지원제도가 꽤 많이 있다. 방송사에서 주는 부족한 자금은 각종 공모를 통해 보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이 바보스럽기도 하지만 어쩌다가 PD를 하게 된 것인가.

"원래 드라마 PD로 출발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1년 동안 고민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밤에 고구마를 먹으면서 만화 보는 일'이 제일 좋더라. 드라마를 하면 예쁜 여자 배우도 보고 만화처럼 스토리텔링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드라마 PD가 됐다. 그러다가 잘려서 다큐를 하게 되면서 드라마를 다시 하고 싶어한 적도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PD가 컨트롤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은 다큐멘터리가 더 좋다."

-드라마를 계속 했어도 성공하지 않았을까.

"그건 모른다. 영화판에도 잠깐 있었는데, 영화판도 무서운 곳이라 저와 같은 세대의 감독들은 다 사라졌다. 어느 분야에서든 최고의 프로가 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저는 아직 1급은 아니고 그 문턱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PD로서 25년여. 15년 동안 공작소가 망하지 않고 버텼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독창적인 한 획을 그었다거나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단한 일은 아니다."

-외주 프로덕션과 방송사와의 관계에서 저작권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

"정부에서 하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진흥지원정책은 잘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큐멘터리 하는 사람들은 도태되거나 소모적일 수밖에 없다. 그 핵심에는 저작권이 있다. 다큐멘터리도 드라마처럼 재방송을 하면 더빙한 성우나 작가에게는 돈을 더 주지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5%만 주더라도 이 산업 전체가 자극을 받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한 편 제대로 만들어서 소위 말하는 평생 '우려먹을 수 있도록' 한다면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공작소는 프로야구 타율로 치면 다큐 메이저리그에서 10년간 3할5푼대를 친 수위 타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집 한 채 사지 못한 신세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는가.

"15년 전쯤에 찍었던 '고지마 원숭이'는 아직도 찍고 있다. 일종의 사춘기 같은 게 있는 것처럼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예전에 찍었을 때는 암컷 원숭이가 딸과 동생을 동원해서 다른 원숭이를 물어뜯는것을 쉽게 해석했었다. 왜 물어뜯었는지에 대해 최근 들어 동물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그때 해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너무 쉽게 의인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해석을 영원히 미루자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이 되려면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다."

김 PD는 소설가 김훈을 자신의 멘토처럼 여기고 있다.

다큐멘터리 방송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년 아주 괜찮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만 제작할 수 없다. 그러나 10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더라도 그중 한 편 정도는 5년, 10년 동안 대상과 소통하고 관찰하고 공부할 수 있고, 한 컷을 찍더라도 공을 들인다면 얼마 전 방송된 '블루베일의 시간'(KBS 파노라마)보다 뛰어난, 세상에 내놓을 만한 보석 같은 다큐멘터리 한 편 정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서명수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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