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로 살아온 만큼 나의 기술을 담은 회사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1999년 1월 2일 문을 연 ㈜유일엔지니어링은 이건호 대표의 '꿈'이 담긴 곳이다.
그는 뼛속까지 엔지니어로 살고 싶었다. 10년 가까이 회사에 다니면서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는 등 엔지니어로서 적극적으로 생활했다. 이 대표는 "1990년대초까지 세척설비는 일본의 기술이 월등해 우리나라가 수입해서 사용했다"며 "이후 하나둘 국산화가 진행됐다"고 말했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회사를 박차고 나올 당시 국내는 IMF라는 위험 속에 있었다. 다니던 회사에서도 '구조조정' 바람이 일었다. 팀장으로서 해외 기술까지 습득한 이 대표는 구조조정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40살 전에 회사를 차리자는 꿈을 이루기 위해 38살의 젊은 나이에 사표를 제출했다. 구조조정 대상이 아니었기에 위로금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는 위로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꿈을 위한 '용기'를 잃는 것이 더 두려웠다"며 "그때 정하지 않으면 끝까지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처음 회사를 차리고서 이 대표는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다. 그는 "IMF 이후라 경기도 좋지 않았을 시기에 누가 작은 공장에 일거리를 줬겠느냐"며 "말이 사장이지 혼자서 트럭을 몰고 다시면서 일거리도 받아오고 가공도해야 했다"고 말했다.
정신없이 5년 세월을 보내고서 2004년 그는 자신을 돌아봤다. 1년에 1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그가 벌어들인 수익은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하지만 이 대표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나는 열심히 하는 사장이 아니라 그저 놀고먹는 사장이 됐을 것"이라며 "시련 속에서도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물론 직원들을 위로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앞으로도 한 분야에만 꾸준히 매진하는 '엔지니어'가 되겠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성공보다는 꾸준한 성장이 오히려 우리 같은 이들에게 더욱 값집니다. 세척설비 전문가, 그것이 저의 영원한 직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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