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

입력 2014-05-13 07:21:19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며, 미래를 불안하다고 여기는 시대에 지속가능한 사회발전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더불어 사는 삶'의 실천이다. 무한정으로 계속되는 경쟁과 그 경쟁에서 이긴 사람만이 모든 것을 향유하는 지금의 사회 시스템으로는 전 세계적 금융위기, 전 지구적 환경위기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돈과 경쟁, 이기심보다는 함께 사는 법이 그만큼 중요해진 것이다.(하승창의 '왜 우리는 더불어 사는 능력이 세계 꼴찌일까' 중에서)

사는 것이 참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시대에 우리는 왜 더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몇 가지의 절망적인 지표들이 있다. 우리나라 소득 불평등 지수는 2012년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9번째로 높다.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가 차지하는 비율)은 16.5%로 OECD 회원국 중 6위다. 노인 빈곤율 상승 속도도 OECD 회원국 중 가장 빠르고, 빈곤율도 2007년 44.6%에서 2011년 48.6%에 이르는 등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빈곤탈출률(저소득층이 중산층이나 고소득층으로 이동한 비율)은 2000년 48.9%에서 2012년 23.45%로 크게 낮아졌다.

'2013년 청소년 정직지수 조사'에서는 고등학생의 47%가 '10억원이 생긴다면 감옥에 가도 괜찮다'고 했다.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답한 비율은 초등학생 19%, 중학생 27%, 고등학생 36%였다. 모두가 절망적인 지표로 보이지만 교육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 볼 때 청소년 정직지수 조사 내용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교육 부분에서 보이는 통계도 비극적이긴 마찬가지다. 상위 20% 가구의 교육비 지출액은 50만4천300원이었는데 하위 20%는 7만6천600원이었다. 꿈은 꾸어야 꿈인데 꿈을 꿀 수 있는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절박함이 절망으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약 6.58배에 달하는 교육비 차이가 절망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게 만든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은 교육이라고 믿고 싶은데 절박함이 절망으로만 남는 한 미래는 어둡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말하고 싶다. 그것이 아이들의 미래를 설계하는 교육 담당자들의 몫이라고 믿는다. 애덤 스미스는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감탄을 표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이 우리의 도덕 감정을 타락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이라고 말했다. 절대적 빈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상대적 빈곤은 더욱 문제가 있다. 그래도 1960년대보다는 훨씬 잘살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사실일 뿐이지 진실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사실보다 진실이 더 강한 의미를 가질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실을 체득한다. 자본이 얼마나 강력한가도 안다. 자본의 힘은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면서 침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환경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자본의 힘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인위적으로 만든 사회제도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학교 교육이다.

당연히 학교 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본보다도 더 중요한 사람 그 자체를 가르쳐야 한다. 가장 행복한 삶은 사람과 따뜻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새벽마다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쓰레기 더미로 가득 찬 도시에서 살지 않아도 됨을 가르쳐야 한다. '너'가 없으면 '나'도 없고, '그들'이 없으면 '우리' 없음을 배워야 한다. 학교 교육은 경쟁을 최고의 목적지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 마지막에 남은 희망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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