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형의 비워진 가벽, 적극적 시선 유도 경관조망 극대화
문정헌은 국내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며 건축주이기도 한 문태준의 고향집이다. 그의 시집을 접하게 되며 '자연과 건축의 관계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특히 '태화리에서 1'은 시와 건축의 공감대를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그의 작품이다. 서정적인 감성으로 다가오는 '시어들과 이미지들의 중첩'에서 마치 자연을 끊임없이 산책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경관이 집을 위한 풍경으로
김천 톨게이트를 지나 직지사 방면으로 가다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봉산면 태화리 마을의 이정표를 보게 된다. 마을 어귀에서 바라보는 태화리의 고즈넉한 포도밭 풍경 속으로 마음을 맡긴 채 걷다 보면 어느새 그 길의 끝자락에 서 있는 문정헌에 이른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대문 밖에서 바라보는 마을의 풍경은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친근한 스케일의 길옆 사철나무 담장, 운치 있게 가지를 늘어뜨린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 석축으로 쌓아올린 뒷 담장과 비닐하우스, 마을회관과 이웃하는 낮은 회색빛 블록담장, 그리고 사람들….
마당과 내부공간의 곳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꾸미지 않은 솔직한 마을 풍경과 더불어, 대지에서 자연 속으로 끊임없이 산책하는 듯한 그런 집을 담아낼 수 있기를 스스로 기대하였다. 지형적으로 진입로보다 다소 높은 레벨과 부정형의 대지 속에 자리한 문정헌은 자연의 변화를 조금 더 실감할 수 있는 여러 방향의 건축적 장치들이 필요했다. 건축주는 원래 그 터에 있었던 오래된 집의 레벨보다 높여 줄 것과 멀리 펼쳐진 주변 산을 조망하기를 원했다. 그러한 요구는 계획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통건축요소 중의 하나인 '툇마루'를 떠올리게 하였다. 수평적 흐름이 강조된 노출콘크리트 가벽과 툇마루의 연결구성은 '자연경관이 집을 위한 풍경으로 바뀌는 차경(借景)효과'를 극대화 시키고자 한 것이다. 마치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처럼….
▷자연 속으로 건축적 산책(promenade)을 떠나다
공간경험을 누적시키는 건축적 산책의 개념은 일련의 연속된 공간체험(외부에서 내부로 또는 내부에서 외부로 유동하는)과 중첩된 벽체들의 상호작용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는 공간의 깊이 감과 방향성을 더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진입부에 놓인 절제된 형태의 출입구는 또 다른 공간으로의 전이를 위한 오브제의 역할을 한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부유(浮遊)하는 듯한 볼륨의 횡적 가벽으로 둘러싸인 집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수평적인 흐름을 강조하는 비워진 장방형의 가벽은 보다 적극적인 시선 유도의 방식으로 사용되며 시각적으로 부각된다.
평활한 벽면에서 돌출된 캔틸레버 장식 보를 통해 동적인 각도로 길게 떨어지는 자연의 빛은 노출콘크리트의 물성(物性)과 함께 자연스럽게 현관 앞으로 인도되며 진입 가벽과 함께 주 출입구의 위치를 인지시킨다. 또한 가벽의 흐름을 타고 길게 이어지는 시선은 사철나무 담장을 지나 먼 산자락에 잠시 머무른다.
내부로 들어서면 투명한 유리창 너머, 바닥과 일체로 이어지는 잔디를 따라 후정의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게 되는데 이는 시각적으로 공간의 수평적 확장을 유도하는 건축적 요소가 된다. 다시 복도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천창을 통해 은은하게 내려오는 확산된 빛의 기운을 느낀다. 채움과 비움을 반복하는 벽체의 구성은 자연채광과 함께 내부와 외부공간을 순차적으로 느끼게 하는 건축적 산책 요소로 작용하게 되며, 긴장감 있는 진입방향성을 유도한다.
▷선택적 조망(選擇的 眺望)을 위한 가벽
건축적 산책을 통해서 자연 속으로 끊임없이 다가가고자 한 욕망과 더불어,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들을 곳곳에 담아내고자 한 의도는 '선택적 조망을 위한 가벽'이라는 건축적 요소를 통해 실현되고 있으며 그것은 문정헌의 특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거실에서 보이는 안뜰은 '차경수법(借景手法)을 위한 가벽'과 함께 변화하는 계절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으며, 서재와 시각적으로 연결된 툇마루를 통해 노출콘크리트 가벽의 끝단에 걸린 먼 산의 풍경을 간접적으로 주시하게 된다. 이러한 건축적 요소들은 자연을 선택적으로 끌어들이는 장치가 되며,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의 긴밀한 '은유적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켜와 켜 사이의 공간을 통해 생성된 영역성은 시선과 동선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다양한 형태의 벽과 함께 서서히 자연으로 확장된다. 복도와 후정, 거실과 안뜰, 서재와 툇마루로 이어지는 내, 외부공간의 유기적인 설정은 끊임없는 '관계와 흐름의 건축'을 만들어 낼 것이다.
◇태화리에서 1
문태준
까만 염소가 칠순의 큰아버지를 끌고 집으로 든다 까칠까
칠 몸 비비며 서 있는 나락들, 여물지 못한 낟알들이 바람으
로 떨어져 내렸다 벼 베지 않았고, 탈곡기 피댓줄에 감겨 돌
지 못했다 헛청에서 땅콩과 검은콩의 갈걷이를 얘기하는 어
머니, 쌀독 비어갔다 아버지는 저물녘 창수 형님의 봉고차에
서 내렸다 젊은 축과 어울려 공사판을 떠도는 당신, 그 잡부
의 차림은 미장하지 않은 벽돌의 틈, 겨울바람이 거칠게 쌓
이고 기워져 있었다 장대가 닿지 않아 남겨진 감들, 끄트머
리에서 다닥다닥 엉긴 감들이 내리는 그림자, 대문은 죄다
열려 있었지만 수챗구멍의 쥐들만이 간혹 그 골목을 횡단했
다 아무도 그해 여름 냉해를 말하지 않았고 몸체에 귀 대면,
포도나무의 숨소리 뿌리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태준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글: 김태윤 에이엠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사진: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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