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화재 2분만 지나도 현관으로 탈출 어렵다
세월호 침몰 참사는 우리 사회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안전불감증'이 다시 한 번 적나라게 드러난 인재였다. 성수대교 붕괴사고(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사고(1995년), 대구지하철 참사(2003년) 등 대형참사가 터질 때마다 외치고 새겼던 다짐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구는 재난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매일신문은 이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다중이용시설과 공동주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난에 대비한 시스템과 안전 매뉴얼, 그리고 안전의식을 전문가들과 함께 점검해봤다.
새벽 1시 20분 대구의 30층짜리 아파트에 불이 난 상황을 가정해봤다. 최영상 대구보건대 소방안전관리과 교수(이하 최 교수)와 함께 화재 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봤다.
◆화재 발생
1904호(19층) 거실에서 '다닥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가 튀었다. 마구잡이로 꽂힌 콘센트에 쌓인 먼지가 발화의 원인. 불은 전선을 태우고 금세 TV로 옮겨 붙었다. 최 교수는 "2분도 되지 않아 연기는 거실 전체를 덮게 되고, 불은 커튼과 소파로 옮겨 붙게 될 것"이라고 했다.
화재 발생 후 3분. 천장의 열감지용 화재감지기가 작동했다. 복도에 설치된 소화전 상부의 화재발신기에서 요란한 화재 경보가 울렸다. 그 경보는 바로 위층인 20층 복도에서도 같이 울렸다. 하지만 안방에서 잠을 자던 김현철(가명'36) 씨 부부는 불이 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잠을 잤다. 집 밖에서 울린 화재 경보는 닫힌 현관문, 중문, 방문을 뚫지 못했다.
같은 시각, 관리사무소 옆 방재실의 화재수신반에 화재표시등이 켜지면서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당직 직원 2명이 화재수신반의 모니터를 살폈다. 105동 건물 19층에서 발생한 화재 사실을 확인했다. 한 직원은 곧바로 비상방송 스위치를 누르고 마이크를 잡았다. "105동 19층에 불이 났습니다. 이는 실제 상황입니다. 주민 여러분은 신속히 대피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몇 차례 방송을 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직원은 119에 화재 신고를 했다.
김 씨 부부는 그제야 잠에서 깼다. 연기가 안방 문틈으로 들어오자 당황한 김 씨는 안방 문을 열었다. 뜨거운 연기와 열기가 방안으로 덮쳤다. 부부는 두 살 난 아이를 들쳐 엎고 안방 발코니로 피신한 뒤 "살려 달라"고 고함을 질렀다.
◆신고와 대피
화재 발생 5분 뒤. 대구소방본부 종합상황실 근무자는 인근 119안전센터에 급히 연락해 고가사다리차, 굴절사다리차, 펌프탱크차, 구급차 등을 출동시켰다. 이런 조치는 동시에 대구시재난안전대책본부로도 전해졌다.
1분이 또 지났다. 실내에 가득하던 연기가 한꺼번에 불길로 바뀌었다. 발코니로 몸을 피했던 부부와 아이는 구조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화마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대피 방송에 놀란 많은 주민들이 잠옷 바람으로 복도로 뛰쳐나왔다. 19층 아래 주민은 계단으로 대피할 수 있었지만, 19층 이상에 사는 주민은 탈출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최 교수는 "16층 이상의 아파트에는 화재 시 연기가 계단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복도에 공기를 단숨에 내뿜는 급기가압제연설비가 설치돼 있다. 하지만 평소 대부분 아파트 주민들은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벽돌이나 종이뭉치로 문이 닫히지 않도록 해놓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연기가 계단을 타고 꼭대기층까지 올라 사실상 비상구 역할을 못하게 된다"고 했다. 따라서 아파트에 있는 방화문은 항상 닫아둬야 한다.
25층에 사는 주민은 어렵게 30층까지 올라가 옥상으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아파트처럼 최근에 지은 고층 아파트는 옥상 출입문 잠금장치가 화재감지와 연동돼 화재 시 자동으로 해제된다. 하지만 상당수 아파트는 이런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화재 시 급하게 옥상으로 향했지만 옥상으로 나가는 문이 잠긴 경우가 많다. 대부분 관리사무소 측이 각종 안전사고 위험 때문에 문을 잠가 놓는다. 그리고 열쇠도 관리사무소가 보관한다. 화재 시 옥상 문이 잠겨 있다면 집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이웃집으로 대피해 구조를 기다려야 한다.
이웃집 화재로 집 밖을 빠져나올 상황이 아니면 실내에서 젖은 수건으로 연기가 들어올 곳을 막아야 한다. 만약 불길이 번지는 등 위급 상황이라면 발코니를 통해 옆집으로 대피해야 한다. 최 교수는 "발코니 한쪽에 마련된 경량칸막이가 탈출구 역할을 하지만 대부분 집에서 각종 적치물로 이를 막아 비상시에 탈출이 쉽지 않다"고 했다.
다시 화재현장으로 돌아가자. 이미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계단실은 한꺼번에 주민이 몰리면서 뒤엉켜 넘어지는 장면이 목격됐다. 충돌 때문에 입을 막았던 손을 떼 바닥에 짚었고 그러는 사이 연기를 흡입, 쓰러지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겼다.
◆놓쳐버린 골든타임
소방대원이 도착한 시각은 신고가 접수된 지 10분이 훨씬 지난 새벽 1시 37분. 불은 플래시오버 현상(연기가 한꺼번에 불길로 바뀌는 현상)으로 이미 1904호 내부를 모두 태웠고, 발코니 유리창을 녹인 뒤 화염을 거세게 뿜으며 위쪽으로 빠르게 번졌다. 다시 2분 뒤 고가사다리차가 도착했다. 하지만 최대 16~17층(52m)밖에 도달하지 않았다.
소방대원들이 엘리베이터를 비상모드로 전환한 뒤 화재 지점 바로 아래인 18층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18층 복도에 전진지휘소를 차렸다. 그리고 위층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사투를 벌인 소방대원들 덕분에 불길은 30여 분 만에 잡혔지만 피해는 막심했다.
최 교수는 "아파트에서 불이 나면 각종 가구와 소파 등 불길이 번지기 쉬운 물건이 많아 10분이면 사실상 온 집에 퍼지게 된다. 그래서 초기 진압이 중요하다. 그러나 진입로를 막고선 주차 차량과 복잡한 아파트 주차장 상황 등으로 인해 소방차가 화재 장소에 도착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안내방송뿐인 매뉴얼
아파트 화재 시 소방대원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가 인명피해를 막는 가장 중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초기 대응을 주도해야 할 관리사무소에는 변변한 매뉴얼이 없다.
고층 아파트 소방계획서에는 ▷화재 시 각층에 사는 주민 대피요령 ▷방화문 이용법 ▷탈출 시 엘리베이터 사용 금지 방침 ▷화재 지점 인근 주민들이 화재 진압하는 방법 등이 명시돼 있지 않다.
최 교수는 "관리사무소는 단순히 주민들에게 대피하라고만 지시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혼란 속에서 중요한 초기 대피 시간을 놓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아파트 내에서 방화관리자를 대상으로 한 화재나 비상 상황 발생 시 훈련'교육도 형식에 그치기 일쑤다.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훈련 자체는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훈련은 평소 몸에 밸 때까지 반복해 실제 상황 시 즉각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져야 한다.
경북대 건축토목공학부 홍원화 교수와 부경대 소방공학과 최준호 조교수가 2008년 5월 대구의 한 30층 주상복합아파트에서 334명을 참여시켜 한 화재 대피 상황 모의실험 결과를 살펴보자.
아파트 화재 시 주대피로가 되는 계단실은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급격한 병목현상이 빚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화재경보조차 듣지 못한 사람(남자 19%, 여자 16%)도 적지 않았다. 특히 여성의 경우 90%가 체력이 떨어져 피난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답변이 나왔다.
홍 교수는 "이 실험은 연기나 장애물이 없고 모두가 화재가 일어날 것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런데도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며 "실제 불이 났다면 대피과정에서의 큰 혼란으로 2차 피해 역시 만만찮았을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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