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 앉은 알프스 봉우리 '자연' 그대로의 호수'언덕
한 방송사의 여행 프로그램 덕분에 크로아티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바로 옆 나라인 슬로베니아까지 찾는 이가 많아졌다. 검색해 보기 전에는 어디쯤 있는 어떤 나라인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낯선 이곳이 지난 4월엔 한국 여행객으로 가득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슬로베니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이탈리아에 둘러싸여 있는 조그만 나라다. 아드리아 해 쪽으로 짧은 해변을 가지고 있고 북서쪽은 알프스 산맥이, 북동부는 판노니아 평원과 닿아 있다. 슬로베니아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오염되지 않은 중앙 유럽의 자연이다. 하얀 눈이 내려앉은 알프스 봉우리, 19세기 풍경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언덕과 호수. 슬로베니아에 다녀오고 나면 이곳을 가장 예쁜 나라로 꼽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블레드는 수도인 류블랴나에서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이곳은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생긴 블레드 호수로 유명하다. 그 옆 암석 절벽엔 중세 성이 우뚝 솟아 운치를 더한다. 에메랄드색 호수 중간에 있는 작은 섬엔 성모성당이, 호수 뒤편으로는 줄리안 알프스의 높은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막 추위가 물러간 날씨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발길 닿는 곳마다 한국말이 들릴 정도로 우리나라 관광객도 많다. 특히 여름 중순이 되면 몰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어떤 요금이든 바가지를 쓰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기 있는 세계 다른 여행지처럼 사람들은 떼를 지어 찾아올 것 같다. 북한의 김정일도 그 매력에 푹 빠져 예정된 일정보다 더 오래 머물고 갔던 곳이라나.
서부의 포스토이나에는 세계적인 종유석 동굴이 있다. 일반에 공개된 동굴 길이는 무려 5.7㎞. 이 경이로운 동굴을 관찰하기 위해 한 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는 투어에서 일부 구간은 미니 기차를 타고, 1㎞ 정도는 걷게끔 되어 있다. 포스토이나 동굴은 200만 년에 걸쳐 형성된 석회동굴로 유럽에서 가장 대표적인 카르스트 지형으로 평가받는다. 굵직한 통로 및 갈라진 작은 동굴이 약 21㎞에 달하고, 종유석과 석순은 장관을 이룬다. 도보 구간 중에 피부색과 수명이 인간과 비슷해 '인간 물고기'라 불리는 올름도 관찰할 수 있다. 이 동굴에서 9㎞ 정도 떨어진 곳에는 동굴만큼 불가사의한 프레드야먀 성이 있다. 123m 높이의 암석 절벽 중간에 굳건하게 자리 잡은 이 성은 입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암석에 들어가 있다. 성의 내부가 석회 동굴로 연결된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다.
내륙 못지않게 해안가 풍경도 매력 있다.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는 피란은 슬로베니아의 서쪽, 뾰족하게 뻗은 반도 끝에 걸쳐 있는 휴양 도시다. 잘 보존된 구시가지는 베네치아풍 건축물과 좁은 골목길로 인상적이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베네치아 하우스'. 이 아름다운 분홍색 건물에는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베네치아의 부유한 상인과 피란 여인이 사랑에 빠지지만 동네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게 되고, 여인을 위로하기 위해 상인이 이 집을 지어 라틴어를 벽에 새겨 넣었다는 이야기다. LASS A PUR DIR. 떠들 테면 떠들라는 뜻이란다. 지중해는 더 파랗게, 마을을 뒤덮은 지붕은 더 진한 오렌지색이 되는 봄과 여름에 멋이 느껴지는 도시다. 특히 이곳의 풍미 넘치는 해산물 요리는 외면하기 쉽지 않으니 지갑이 가벼워지는 것쯤은 각오해야 한다.
작은 나라이다 보니 이들 유명 관광지는 류블랴나를 거점 삼아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물론, 시간이 허락한다면 어떤 도시든 하룻밤을 보내며 좀 더 여유 있게 머무는 게 좋다.
언덕 위의 성을 왕관처럼 쓰고 있는 류블랴나는 아담하고 조용한 도시다. 주요 명소가 도보로 닿을 만한 거리에 있어 구시가지를 둘러보는 데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500년 전의 모습 그대로인 골목을 가장 잘 살펴보는 방법은 역시 두 발로 걷는 것. 류블랴나의 중심에는 프레셰렌 광장이 있다. 슬로베니아의 모든 길이 이 광장으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레셰렌 광장은 물리적으로나 은유적으로 이 나라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광장의 중심엔 슬로베니아의 국민 시인 프란체 프레셰렌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주변은 바로크와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이 채우고 있다.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프란체스코 수태고지 교회, 류블랴나 대학의 본관 건물, 류블랴나 성당 등 건물들은 유럽의 역사를 잘 드러낸다. 얼핏 봐서는 건축 양식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데, 대부분 슬로베니아의 '가우디'라 불리는 요제 플레츠닉이 지은 것들이다.
광장에서 동쪽으로 강을 따라가면 류블랴나에서 가장 유명한 촬영 장소인 용의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 장식을 감상하며 류블랴니차 강을 가로지르면 지역민들이 고기와 치즈, 조리한 음식을 쌓아 놓고 파는 플레츠닉 시장을 만날 수 있다. 새로 자갈을 깐 거리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 아름다운 로바 분수와 인상적인 15세기 시청, 그리고 류블랴나 성으로 안내하는 수많은 통로와 접하게 된다. 로마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도 발견할 수 있다.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류블랴나 성은 9세기에 세워졌지만 1511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재건된 것이다. 류블랴나 성에는 적어도 두 번은 올라야 한다. 한번은 낮, 한번은 해질 무렵이다. 낮에는 꼭대기로 가는 통로 중 한 군데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줄리안 알프스가 만들어내는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하자. 일몰 때는 슬로베니아산 와인 한 병을 챙겨 푸니쿨라로 성 정상에 올라 성벽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자. 점점 붉게 물드는 하늘과 도시 불빛이 어우러지는 모습에 이내 빠져들게 될 것이다. 눈 덮인 줄리안 알프스, 지중해, 중세 건물들이 어우러진 슬로베니아는 소박한 외양 뒤에 문화와 음식의 세련미를 숨겨놓았다.
또 중부와 동부 유럽의 국가들을 연결하며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많지 않은 나라 중 하나다. 어디를 가든지 열정적이고, 친절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슬로베니아는 다양한 매력을 갖추고 있어 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글 사진 정영희 전 '대구문화' 통신원 android2019@nate.com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