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 어려워 하루 한 끼도 겨우 해결"
키 140㎝에 몸무게 38㎏이 겨우 나가는 박춘자(85) 할머니는 허리가 반으로 굽어 버렸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두 딸과 외손자들까지 수십 년 간 가족들을 홀로 돌보느라 할머니의 작은 몸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오늘도 할머니는 진통제를 먹지 않으면 잠이 들지 못할 정도로 요통, 신경통 등에 시달리지만 한 달에 30만원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로는 외손자 둘과 함께 사는 생활비도 부족해 병원은 꿈도 꾸지 못한다. "내가 100살까지는 살아야 손자들도 다 크는데 몸이 자꾸 아파서 큰일이야."
◆혼자 두 딸 키워
박 할머니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할머니는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집안 형편 때문에 아버지의 고향인 대구로 왔다. 아버지의 고향이라지만 한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대구는 너무 낯선 곳이었다.
힘들게 적응한 곳에서 할머니는 결혼했고, 당시 약국을 운영하던 할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아 행복하게만 살 것 같았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큰딸이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혼자서 약국을 운영하며 딸들을 키워야 했다.
"할아버지는 약사였지만 난 아니었어. 그래도 먹고살려고 고등학교 졸업도 못한 내가 약국을 운영한 거지. 손님들이 어느 약대 나왔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고등학교도 못 나왔다고 하면 다들 놀랐지."
약사 면허도 없이 운영하던 약국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병원에서 일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해서 딸들을 돌봤지만 삶은 점점 팍팍해졌다. 둘째 딸은 정신지체 장애까지 안고 있어 할머니의 고생은 더했다. 이제 큰딸은 연락조차 닿지 않고, 장애가 있는 둘째 딸이 낳은 두 손자마저 할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고생했다는 말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냥 남들 도우며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지. 다 좋았어. 하나도 안 힘들었어. 오히려 딸이 나를 돌봐주고 손자들이 나를 돌봐주는 거야."
◆고생하며 얻은 건 고통스러운 병뿐
할머니는 평생 자식들과 손자들을 돌봤지만 지금은 공장 부지 한 쪽에 있는 판잣집 단칸방에 살고 있다. 18살, 12살 외손자들과 함께 사는 이 방은 겨울에는 난방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겨울에는 어설픈 벽과 천장으로 들어오는 칼바람 때문에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써도 입김이 계속해서 나온다. 하지만 그마저도 할머니에게는 월세 10만원이라는 큰 부담을 준다.
정신지체 장애 2급을 지닌 둘째 딸은 할머니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일용직 노동자인 남편은 IMF 이후로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았고, 장애를 가진 몸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IMF 전후로 할머니는 일본에 머물렀지만 딸이 어려움을 겪고 있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손자를 돌보며 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할머니의 몸이 온전치 못해 장애를 지닌 딸이 근처에 살며 끼니를 챙기고 있다. 젊은 시절 무리하게 일을 한데다 나이가 많아 골절, 요통, 신경통, 관절통, 치통 등 각종 통증에 손자들을 돌보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할머니가 치매와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하루 한두 끼도 겨우 해결하며, 치통 때문에 음식을 잘 씹지 못해 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는 일이 다반사다.
평생 가족을 챙긴 할머니이지만 할머니는 오히려 딸과 손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딸이 끼니때마다 와서 밥을 해주지 않으면 굶어 죽어. 고맙지 고마워. 손자도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마다 챙겨줘 고맙지. 내가 자식들과 손자가 없었으면 못 살았을거야."
◆어려워도 항상 손자와 남 생각
할머니가 그토록 아끼는 자식과 손자들도 건강하지 못하다. 둘째 딸이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것과 함께 할머니가 자식처럼 키운 손자들도 고통을 겪고 있다.
18살 손자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난 뒤 3년 가까이 집 밖을 나서지 않는다.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으로 추정되지만 치료조차 거부하고 있다. 집에 있을 때는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는 일이 전부다. 한 번씩 손님이 찾아와도 손자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님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치매기가 있는 할머니와 정신지체 엄마는 온라인 게임을 하고 있는 손자가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손자가 학교를 그만뒀는데 컴퓨터로 만날 공부를 해. 내가 힘들 때도 항상 도와줘. 착한 애야, 똑똑한 애야."
초등학교 5학년에 들어간 둘째 손자도 학교에 다녀오고 TV를 보는 것 외엔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할머니나 엄마가 TV를 끄라고 잔소리를 하면 극도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날카로워진다. 학교에서도 둘째 손자가 적응하지 못해 학업을 그만둬야 할 정도의 위기라고 말한다.
할머니도 엄마도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롭다. 월 30만원의 기초수급비 외에는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며 그 손길을 마다했지만 이젠 아이들 생각에 용기를 냈다. 할머니는 100살을 넘게 살겠다며 웃으며 얘기하지만 장애를 가진 딸과 어린 손자들 걱정에 오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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