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 <17>달성고분군 금동관

입력 2014-04-26 08:00:00

대구 出字형 금동관, 지역 권력자 왕관? 신라 왕실 하사품?

달성고분 37호에서 출토된 금동관. 신라 금관의 정형(定型)인
달성고분 37호에서 출토된 금동관. 신라 금관의 정형(定型)인 '출(出)자' 모양을 하고 있다. 대구 한복판에서 발굴된 신라 양식의 금동관을 놓고 사학계에서는 '지역 수장의 왕관설'과 '신라왕실의 하사품설'이 대립한다. 학계에서는 고분이 축조될 당시 4, 5세기는 달구벌 세력이 이미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간 시기이기 때문에 신라 왕실의 선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같은 무덤에서 발굴된 금동관. 역시
같은 무덤에서 발굴된 금동관. 역시 '출자 모양'을 하고 있으나 양옆의 사슴뿔 장식이 생략돼 단순한 느낌이다. 두 관의 둘레가 18㎝로 같아 동일인이 썼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올림픽 승자에게 월계관은 최고의 영예. 미인대회 의전(儀典)은 왕관 수여식에서 가장 빛난다. TV 사극 왕비 즉위식엔 화관(花冠)이 하이라이트다.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얹혀지는 관은 장식 이상의 것이며 선민(選民)의식의 상징이다. 보통 사람과 구별하여 사회적으로 특별한 인물이라는 표시인 동시에 존엄한 자로서의 식별 수단이기도 하다.

신라가 '금관의 왕국'이라는 사실은 이제 학계의 상식이 되었다. 실크로드 문명학자인 정수일 교수는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금관 가운데 절반은 신라의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고대(古代)에만 한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은 모두 6점. 그 화려함과 미적(美的) 가치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미려(美麗)한 왕관의 반열에 올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1923년 금동관이 대구에서도 출토되었다. 출(出)자 모양에 사슴뿔 장식까지, 경주 금관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지역 수장(首長)의 왕관인가, 신라왕의 하사품인가. 달성 금동관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천왕당 못 공사중 금동관 2점 출토

달성 금동관 발굴과정을 잠시 들여다보자. 1923년 일제는 지금의 동산병원 근처 천왕당 못을 메우는 대규모 공사를 벌이게 된다. 그 못은 지금의 서문시장이 되었다. 주변 구릉의 토사를 파내 못을 메우던 중 고분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달성고분 37호분은 그렇게 세상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이 고분에서는 삼국시대 초기 금동관 2개가 출토됐다. 금동관 외에도 왕릉급 부장품 수천 점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대구에서 금동관 발굴은 처음이었고 더구나 2개가 한 번에 발견된 것은 전국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관들은 모두 1석실에서 나왔다. 가장 높은 신분이 안치됐던 주석실이었다. 하나는 높이가 30.9㎝로 높이로만 봐서는 경주 금관과 비슷한 크기다. 신라 금관의 정형(定型)인 출(出)자 형태에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양옆에 나란히 세웠다. 금동 판엔 금박편으로 만든 동그란 장식들을 오려붙였다.

또 다른 관은 높이가 23㎝로 약간 작은 편이다. 두 관 둘레가 모두 18㎝로 한 사람이 썼을 거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역시 출자 모양을 하고 있고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뒤쪽에 사슴뿔 장식을 세우지 않아 앞에 것보다는 단순한 느낌이다.

◆왕관인가, 신라왕의 하사품인가

제일 큰 관심은 이 관의 주인이다. 제1석실 무덤의 주인공은 금동관이 말해 주듯 삼국시대 초기 대구지역의 수장급이 분명하다. 그들은 달성세력으로 그 무렵 대구에 할거하던 화원, 불로동, 칠곡, 팔달동 등 집단보다 훨씬 뛰어난 문화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의문이 하나 들만도 하다. 지역 최고 수장의 머리에 썼던 관이라는데 왜 왕관이라 부르지 않는 걸까. 그들은 왕의 신분이 아니었던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무렵 달성세력은 아직 고대국가나 독립된 정치체제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왕도 아닌데 왕관 수준의 장엄구를 쓰게 된 배경이 궁금해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37호분 금동관은 신라왕의 하사품일 가능성이 크다. 대리 통치자에게 주는 선물 성격이었다. 부장품을 통해서 본 37호분 조성연대는 5세기 무렵. 이 시기 달성세력은 이미 신라에 편입되어 사실상 독립국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수많은 신라계 토기, 철기가 이를 증명한다.

역사학자 김현숙 씨는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학자마다 의견 차이가 있지만, 달성 세력은 4, 5세기 무렵에 신라의 수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며 '이 시기 대구에는 간(干)급 유력자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면 신라 왕실은 왜 왕도 아닌 달성 유력자에게 금동관을 수여했을까.

◆대가야 전초기지로 달구벌 세력 이용

그 의문을 푸는 열쇠는 신라의 4, 5세기 대외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무렵 신라는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나선다. 2세기 무렵 압독국을 수중에 넣었고, 의성의 조문국도 휘하에 두었다. 그동안 한반도 동쪽 변방에서 소국으로 위축돼 있던 신라는 지증왕 이후 남부지역 맹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몸집을 키운 신라는 이제 동진(東進)을 서두른다. 그 가도(街道)에 가야가 있었고 가야는 신라가 동남부 지역을 제패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또 하나 숙제가 있었다. 가야 정벌 길목에 바로 달구벌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대구는 신라와 가야 사이에서 힘의 균형추 구실을 했던 곳이다. 경주세력 입장에서 대구는 대가야 최전방 기지로 요긴한 전략 거점이었다. 그때부터 신라의 노련한 외교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당시 신라는 달성 세력을 완전히 복속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가야와 정복 전쟁을 치르기에는 너무 벅찼을 것이다. 혹 가야와 달성세력이 연합이라도 한다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질 수도 있다.

신라는 우선 달구벌 세력을 포용하기로 한다. 고분에서 나온 수많은 신라 토기들이 이를 입증한다. 최고급 수준의 장신구들은 당시 두 체제 밀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두 세력의 밀월은 대가야를 복속시키기 전까지만 유효한 시한부 동거였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기고, 나는 새가 없으면 활은 치워지는 법. 562년 대가야를 함락한 신라는 달구벌 세력에 제공되었던 선물들을 하나 둘씩 거두어 간다. 이윽고 6세기엔 대구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완전한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만다.

◆'현실 안주' 선택한 달구벌 세력

달구벌 세력이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에 자리 잡았던 것은 기회이자 위기였다. 지정학적 유리(有利)를 기반으로 고대국가로 도약할 수도 있었고 천혜의 입지에 안주하면서 정체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다. 달구벌 세력은 눈앞에 놓인 독배와 축배 중 '현실 안주'라는 독배를 택했다. 신라왕실이 내려준 '짝퉁 금관'에 취해 달성 안에 자신을 가두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 양 세력의 운명은 크게 갈렸다. 하나는 한반도 통일 왕국의 맹주로, 하나는 변방 도시의 촌주(村主)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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