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정양용·정조…조선시대 신동들이 지은 동시

입력 2014-04-19 07:14:25

옛 선비들이 어릴 적 지은 한시 이야기/ 허경진 지음/ 알마 펴냄

이 책은 옛 선비들이 어릴 적에 쓴 한시 40여 편을 소개한다. 저자인 허경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1986년부터 100권을 목표로 '한국의 한시' 총서를 집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옛 선비들이 어릴 적에 지은 한시를 따로 모아 설명을 더해 책으로 펴낸 것이다.

고려'조선시대 어린이들이 지은 한시는 지금으로 치면 동시다. 하지만 요즘 동시와는 사뭇 다르다. 자연과 일상을 동심으로 묘사하는 점은 닮았지만 때때로 세상 이치와 우주 원리를 꿰뚫는 철학적인 시도 있다.

우선 신동 시인들이 눈에 띈다. 정약용(1762~1836)은 10살 이전에 지은 글들만 모아 '삼미집'이라는 문집을 냈고, 조갑동(1743~1751)은 요절했지만 이후 작은아버지가 조카의 유작들을 모아 '조동자유고'라는 시집을 펴냈을 정도로 시를 많이 지었다.

재치도 넘친다. 오성 대감 이항복의 집 연꽃을 땄다가 혼쭐이 나자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건 재상이 할 일이 아니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대드는 구봉서(1596~1644), 술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책을 안 읽는다고 나무라자 할아버지 술버릇을 들어 시로 반격하는 채무일(1496~1556) 등이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비범했다. 정조(1752~1800)는 당시에는 잘 쓰지 않던 '태양'(太陽)이라는 단어를 써서 천하를 다스릴 제왕의 기상을 시에 담아냈고, 김인후(1510~1560)는 5세 때 천자문의 첫 장 '우주홍황'을 이용해 우주의 원리를 표현한 시를 지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시는 사회 현실의 그늘과 부조리를 다룬다. 밭둑을 두고 이웃 어른과 다투다 관가에 끌려가서는 '봄비가 오면 꽃들도 서로 다툰다'는 시를 지어 삶의 고달픔을 고발한 한 소년가장, 9세 때 처음 학교에 가 천자문을 배우고는 '나라 풍속이 남자만 받들고 여자는 천대한다'며 분노하는 시를 쓴 개화기 여류문인 오효원(1889~?) 등이다.

당시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한시 형식을 친숙하게 접했다. 태어나 처음 배우는 글인 '천자문'은 한 편의 시였고, 이어서 배우는 '추구'(推句)는 좋은 시구들을 골라 엮은 책이었다. 특히 가정에서 한시 교육이 많이 이뤄졌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어린이들의 글쓰기 스승 대부분은 할아버지, 아버지, 가까운 집안 어른들이었다. 저자는 "옛 조상들의 가정교육이 당시 어린이들이 재치와 상상력을 담은 한시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며 "가정에서 자녀와 마주앉아 글짓기를 도와주는 부모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역사에 남을 천재들의 이야기를 실었지만 일독을 권한다.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이다. 215쪽, 1만6천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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