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3년 7월 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박근혜 대통령은 착잡한 심정으로 "국정원은 국가와 국민의 안전보장 업무가 설립 목적이다. 국정원은 스스로 개혁에 박차를 가해달라"고 주문했다.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 개입 의혹을 제기하던 야당이 정치권에 의한 대대적인 국정원 손질을 요구하자 '셀프 개혁'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야당의 반발이 계속되자 한 달 보름 뒤인 8월 26일 다시 입을 열었다. "야당이 주장하는 국정원 개혁을 반드시 이뤄내겠다. 국정원이 재탄생하도록 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2. 2014년 3월 1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박근혜 대통령. "증거 자료에 위조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철저히 수사해서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 잡을 것이다"고 했다. 간첩 혐의로 기소된 서울시 공무원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된 국정원 자료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난 뒤였다. 검찰은 대통령 발언 직후 국정원을 압수수색하며 수사에 속도를 냈고, 14일 국가정보원 대공수사처장(3급)과 부하직원들을 증거조작 혐의로 기소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했다.
#3. 2014년 4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검찰 수사로 국정원의 증거 조작과 사법체계 훼손이 사실로 드러나자 대통령은 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게도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에 허점이 드러나 국민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고 또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정원 발(發)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대통령은 국정원에 무한신뢰를 보냈고,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밖으로부터의 개혁 압력도 자체적으로 하도록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자임했다. 국내외 문서를 조작해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든 것은 물론 부실 증거물로 외국 정보기관들에도 웃음거리가 된 국정원이지만 대통령은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면 문책하겠다"는 단서를 달면서 이번에도 국정원장을 보호했다.
과연 이게 맞는 통치행위일까.
지난 대통령 선거 때부터 국정원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대통령 선거 때 여론 조작 의혹을 받은 데 이어 박근혜정부 출범 초기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파문이 불거지면서 경색된 정국이 풀리지 않자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가운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NLL(북방한계선) 발언을 공개하면서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이어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기소했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아들 논란에도 국정원이 아이의 정보를 교육지원청에 요구했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이후 국가기관 대선 개입 사건 수사는 유야무야됐다.
국정원의 반전 시도는 간첩조작 사건에서 백미를 보였다.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증거 조작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 공안 당국은 물론 우리 외교 라인과 공소 유지를 담당하는 검찰도 철저히 속였다. 국정원은 '간첩 유 씨가 북한에서 휴대폰으로 찍은 것'이라며 증거자료 사진을 제출했는데 전문가들이 위성 GPS 분석을 해보니 중국에서 촬영한 것으로 판명됐다. 정보 취득 능력 수준을 두고 국제적 망신을 산 것은 물론이다.
해명 과정도 거짓말로 일관됐다. 중국 정부가 가짜 문서를 확인하자 "위조는 없었다"고 발뺌하더니 "고무관인은 누르는 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도 국정원 협조자에게 속았다"며 덤터기 씌우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정말 철저히 보호해야 할 블랙요원의 신상마저 변명을 위해 공개한 것이다. 수사를 맡았던 검찰 관계자조차 "문서 조작을 한 것도 잘못이지만 중국 내 베테랑 요원들과 휴민트(정보원)를 노출시킨 것이 더 큰 실책"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이번 국정원의 증거 조작 사건은 대공 수사에 대한 근본적 불신을 초래할 것이다. 아무리 수사를 잘해도 국민들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공안 수사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간첩과 좌경 용공 세력의 발호를 가져오고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에 대한 책임을 국정원장의 '3분짜리 사과문' 한 장으로 끝낸다면 너무 웃기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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