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에는 본부와 도서관 건물 사이에 광장이 있는데, 서울대 사람들은 이곳을 아크로폴리스 광장이라고 부른다. 내가 신입생이었을 때 PD(민중민주) 계열 학생들의 우상이었던 백기완 선생이 이곳에서 강연을 했었는데, 강연에서 선생은 서울대 학생들이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면서 이곳을 '새뚝이 마당'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했었다. 새뚝이는 남사당 놀이패에서 기존 놀이판의 막을 내리게 하고 또 다른 장을 새롭게 여는 사람을 말한다. 백기완 선생은 새뚝이가 신선하게 등장해 과감한 발상과 성실한 활동으로 낡은 관습을 허물고 보다 나은 새 판을 만든다는 점에 주목해 사회 변화를 이끌어 가는 민중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 말을 썼었다.
'새뚝이 마당'이라는 이름은 공간이 지닌 성격에 부합하고,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다는 명분에도 맞으며, 무엇보다도 '아크로폴리스 광장'이라는 말보다 짧아서 이름으로 부르기 쉽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름은 널리 불리지 못했고, 지금은 그런 이름으로 부르자는 이야기들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서울대 사람들이 새뚝이 마당이라는 이름이 가진 명분보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이라는 이름이 가진 역사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이라는 이름이 사라진다고 해서 아크로폴리스 광장과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특정 정파의 이념이 담긴 새뚝이 마당으로 부른다면 광장의 역사는 한 정파의 것이 될 것은 분명했다. 새뚝이 마당이라는 이름이 좋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불러야 할 만큼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바꾸겠다는 한 지방선거 예비 후보자의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 약력을 적을 때 항상 제일 첫 줄에 '경북 선산 生(생)'으로 적는 나로서는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실 박정희시로 바꾸자는 것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새뚝이 마당으로 바꾸자는 것보다 더 정파적 입장이 강한 것이어서, 30년도 채 안 되었던 아크로폴리스 광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선산 구미의 역사를 묻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제안한 사람이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고 모두가 존경하며,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소련의 레닌그라드나 스탈린그라드와 같이 권력자의 이름을 딴 도시의 이름이 역사의 평가가 이루어지며 사라진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택리지에 있는 "조선 인재 반은 영남이요, 영남 인재 반은 선산"이라는 구절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고향에는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일 뿐이었다는 선산 구미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불필요한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민송기 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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