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通]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매일신문 최석채 주필

입력 2014-04-05 07:08:51

불의를 못 본 체한다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기자는 '반골'이 되어야 하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최석채 선생. 1955년 9월 14일 최석채 선생 공판 때의 모습이다. 매일신문DB
흰 두루마기를 입은 최석채 선생. 1955년 9월 14일 최석채 선생 공판 때의 모습이다. 매일신문DB
매일신문 신문전시관에서는 최석채 선생의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매일신문 신문전시관에서는 최석채 선생의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매일신문사 1등 로비에 있는 최석채 선생의 흉상.
매일신문사 1등 로비에 있는 최석채 선생의 흉상.
최석채 선생의 고향인 김천 황악산 직지문화공원 끝자락에는 선생의 기념비와 사설비가 있다.
최석채 선생의 고향인 김천 황악산 직지문화공원 끝자락에는 선생의 기념비와 사설비가 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확한 사실과 칼보다 날카로운 필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뒷받침돼야 한다. 최석채 선생은 이를 삶으로 증명한 언론인이다. 그의 글에는 시대정신과 사회에 대한 애정이 녹아있다. 장기 집권을 노리는 정권을 향해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고 펜촉을 겨눴고, 3'15 부정선거를 비판하며 '호헌 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고 권력의 횡포를 꾸짖었다. 글 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위협을 당해도, 그는 또 펜을 들고 글을 썼다. 최 선생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기자 정신은 아직도 살아 있다. '신문의 날'을 맞이해 그를 다시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매일신문 47기 황수영입니다. 가상 인터뷰인데도 굉장히 떨리네요.

▶허허, 그런가? 기사 잘 보고 있소. 기자 생활은 할 만한가? 지금은 문명이 발달해서 기자들 일하기 참 편해졌소. 스마트폰인가? 별의별 신기한 물건이 다 있더군. 기사 쓰기도 편하고, 정보 찾기도 편하고. 거기 두드리면 다 나오지요? 힘들다고 불평하려거든 내 앞에서 말도 꺼내지 말아요.

-네. 알겠습니다!(불평하려다가 말이 쑥 기어 들어갔다.) 선배님은 어떻게 신문과 인연을 맺으셨나요?

▶먼저 아버지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아버지는 빈농의 막내아들이었소. 농사로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무작정 서울로 가셨지요. 국권 피탈 때 아버지가 스무 살이었지. 그때 1년간 일본말과 모스 신호를 배웠고 충북의 한 우체국에 발령을 받았소. 조선인으로서 아버지가 진급에 어려움을 겪자 내가 열 살 때 혼자 일본으로 가셨지. 그때 매달 5원씩 부쳐줬지만 우리 가족 생활이 쪼들렸어요. 그래서 그해 신문 배달을 시작해 한 달에 50전을 벌었고, 그때부터 신문이랑 친해졌지.

-열 살 때 신문 배달을 하셨다니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네요. 혹시 그 나이에 기사까지 쓰신 건 아니죠?

▶내가 처음 기사를 쓴 건 열세 살 때였소. 그래도 어린가? 하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나를 일본에 데려가 중학교에 입학시켰지. 그때 아버지가 일본의 한 항구마을에서 신문 지국을 하고 계셨어요. 한국에서 하던 신문 배달을 일본에서도 했으니 그 인연 참 질기지. 아버지는 지방기사를 보내는 일을 했는데, 하루는 많이 편찮으셔서 "기삿거리 없는지 네가 경찰서로 한번 가봐라"고 하셨소. 그 나이에 뭘 알겠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바로 경찰서장실로 갔지. 서장도 기가 찼을 겁니다. 열세 살짜리 조선인이 와서 기자라고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그때 서장이 "농가에 불이 나서 닭 12마리가 타 죽었다"고 했고 내가 그걸 기사로 썼지. 이게 진짜 신문에 나갔어요.

-첫 직업이 신문기자였나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세무원, 그리고 경찰, 나중에 신문기자가 됐어요. 사람들이 세금 걷는 세무원을 싫어한다지만 일본에서 도요하시 세무서에서 근무할 때 주민들이 나를 참 좋아했지요. 경찰도 해봤지. 해방되고 우리나라에 와서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민족운동, 청년운동을 했지요. 아마 1949년이었을 겁니다. 그때 주변에 친일파가 많아서 경찰이 민심 수습을 못 했어요. 그래서 청년단 추천을 받아 경찰 특채를 한다고 했고, 내가 경찰이 됐지요. 4년 정도 했으니까 그리 길지는 않아요.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직업이 이 세 가지라고 하는데 나는 이거 다 해봤소. 하하.

-여기서 매일신문 테러 사건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요. 선배님은 서슬 퍼렇던 독재정권 시절, 정권을 정면 비판하셨지요.

▶논설은 시대 상황의 산물입니다. 그 시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평범한 글일 뿐이지요.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도 마찬가집니다. 정치 행사에 중고등학생까지 동원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자유당이 이승만 대통령 영구 집권을 위해 학생을 이용한 거지. 대구 더위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을 땡볕에 세워놔서 막 쓰러지고 했잖소. 당시 비판적인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문제 의식을 가졌을 겁니다. 다만 용기가 필요했지. 그래서 글을 썼더니 나를 옥에 잡아넣더라고.

-이 글 하나 때문에 한 달간 옥고를 치르셨지만 결국 언론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건 단순히 지역 신문의 수난이 아니었소. 건국 이후 처음 있는 관권 대 민권의 공개적 대결 구도의 시작이었지. 정권을 비판했다고 언론사에 깡패를 보내서 윤전기 부수고, 신문 훔쳐가고, 테러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우리 신문은 정권의 횡포에 저항하기로 했소. 내가 구속되기 이틀 전, 당시 대구매일신문 사주인 서정길 주교님이 이렇게 물으셨지요. "양심에 맹세해서 끝까지 버틸 자신이 있느냐." 그때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으며 끝까지 버티겠다"고 했소. 신문사는 내가 풀려날 때까지 테러와 독재정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저항했지. 1955년까지만 해도 외신 기사 수가 국내 기사보다 많았는데 내가 구속되고 공판이 끝날 때까지 테러 비판 기사와 정권을 규탄하는 사설 비중을 키웠지요. 그해 10월 14일 불구속기소로 석방됐고, 12월 6일 무죄가 선고됐소.

-세상은 선배님을 '반골(反骨) 언론인 최석채'라고 부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언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진정한 '기자 정신'은 무엇인가요?

▶반골 정신은 불의와 부정에 굽히지 않는 정의감을 말하네.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체한다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기자는 저항 기질이 있어야 하오. 이건 반골의 비판 기능을 활용해 주장하는 용기야. 한국 언론에 반골 언론, 저항 기질이 있다면 이것처럼 자랑스러운 게 없지요. 하지만 요즘 그게 많이 죽은 것 같소. 언론이 많이 위축된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정의감을 굽히지 않는 '반골'이 있어야 나라가 튼튼하고 사회가 건강해져요. 그래, 자네는 반골 기자가 될 준비가 됐는가?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참고 자료 : '반골(反骨) 언론인 최석채'(성균관대출판부), '정치성 테러와 매체 편집 태도 변화에 관한 고찰: 대구매일신문 테러사건을 중심으로'(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최종진, 1994)

◆몽향 최석채(夢鄕 崔錫采'1917~1991)

언론인. 경북 김천 출생. 일본 중앙대 법학부 졸업. 매일신문 편집국장, 주필(1955~1959). 매일신문 명예회장(1981~1987). 2000년 한국인으로 최초로 국제언론인협회(IPI)가 뽑은 '언론자유영웅(Press Freedom Heroes) 50인'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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