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장 지휘봉" vs "생활도구·무기"…학계 풀리지 않는 숙제
부시맨에게 콜라병은 소라껍데기 같은 소리통이거나 이상한 완구의 의미쯤 될까. 병에 담긴 흑갈색 액체가 인류를 얼마나 매료(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음)시켰는지 그들에게는 다른 별의 이야기다.
이런 '문화 지체'는 곧잘 뒤집어지기도 하는데 이른바 '문화의 반전'이다. 1998년 서변동 유적에서 고상(高床) 건물지가 발견됐다. 고상건물지란 청동기 주거지에서 망루나 누각처럼 길게 늘어선 건물들을 말하는데 그 용도에 대해 학계에서는 뚜렷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곡물저장소, 신전, 망루, 하계휴양소 등으로 막연히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후대 사가(史家)들이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선사인들이 본다면 아마 한바탕 폭소가 터질 것이다.
"와, 우리 돼지우리를 신전(神殿)이래." "닭장을 여름 펜션이라잖아."
이런 문명의 반전(反轉)은 서변동 별모양도끼(성형석부, 다두형석부 모두 같은 용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98년 동화천변에서 이상한 도끼 하나가 출토되었다. 별 모양의 다두형(多頭型) 석부. 이 석기는 그 용도에 대해 아직도 아무도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시대인들에게는 일상이었을 그 어떤 용도가 후대에 몇백 년 동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도끼 지름 14.6cm, 무게는 1kg=우선 서변동 별도끼 출토 경위부터 알아보자. 도끼가 출토된 곳은 서변동 취락 유적지, 영남문화재연구원 발굴현장에서다. 당시에 모두 49기의 주거 유적이 발견됐고 성형석부(星型石斧)가 출토된 것은 제1호 주거지.
도끼의 지름은 14.6㎝, 두께 6.1㎝, 무게는 1천4g이다. 전체 모양은 톱니 모양이고 재질은 사암(砂岩). 11개의 톱니바퀴가 둘러쳐진 석부로 구멍은 관통되지 않았고 한쪽엔 3.2㎝, 다른 쪽엔 2.1㎝의 홈이 파진 상태다. 이런 다두형 성형석부는 세계적 분포를 보인다. 중남미 대륙이나 유라시아 각지에서도 출토됐고 내몽고 열하(熱河) 지방이나 코카서스, 일본에서도 존재가 확인된다.
한반도에서는 주로 강계, 영변, 평양, 송림시 등 서북, 동북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파주 옥석리, 보령, 천안, 여주 등에 출토 보고서가 보이고 남부지역에서는 대구, 경주, 울산, 순천, 화순에서도 출토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무기, 생활도구, 족장 위신재(威信財) 용도 추정=문명사적인 입장에서 도끼는 어떤 기능을 했을까. 모양에서 보듯 도끼는 무거운 돌에 날(刃)을 달아 내리침으로써 물건을 찍고, 자르고, 부수는 도구다. 전쟁 무기, 생활도구는 물론 조리에도 도끼는 유용하게 쓰였다. 돼지나 소 같은 큰 짐승들을 잡고 살과 뼈를 바를 때, 가죽을 분리하는 데도 도끼는 매우 유용했다.
사실 외관에서 보듯 도끼의 기능으로 주목받는 것은 무기로서의 효능이다. 역사적으로 도끼는 최고(最古)의 격투 무기 중 하나였다. 부족 간의 정복 전쟁이 본격화된 청동기시대에 도끼의 보유 여부, 숙련 정도는 지배와 피지배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활이나 돌창도 무기로 유용하게 쓰였지만, 근거리 전투나 육탄전에서는 도끼의 조작 능력이 승패를 결정했다.
인류 역사에서 도끼의 또 하나의 용도는 권력의 상징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농업 혁명 이후 잉여생산물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계급이 생겨났다. 지역의 정치 지도자로 성장한 부족장들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으로 위세품(威勢品)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것들이 돌도끼, 석검, 청동거울 같은 것들이다.
◆동서변동 별도끼 용도 미스터리=그러면 이 원시도끼는 어떤 과정을 거쳐 별모양도끼로 변형, 진화해 갔을까. 인류의 석기 제작 기술은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거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에 석기 제작은 단순한 생활도구 차원을 넘어 미(美)의식이나 예술성을 반영하는 수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미의식이 원시신앙과 만나면 제기(祭器)나 신성물로, 부족장의 정치력과 만나면 위세품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자, 이젠 오늘의 주인공 서변동 별도끼 속으로 들어가 보자. 대구 돌도끼의 용도에 대해 많은 학설이 대립한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경우처럼 서변동 석부도 족장의 위신재나 생활도구, 무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물론 대구 별도끼 만의 고유한 특성도 있다.
먼저 권력자의 위신재로서 용도에 주목해보자. 서변동 별도끼는 공예품 수준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사용처를 추측하기 어렵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른다고? 이 점 때문에 서변동 도끼는 생활도구로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 도끼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홈 구멍이 막혀 있다는 점이다. 홈 구멍이 막혀 있다는 것은 손잡이와 돌의 결합이나 착병(着柄)에 불리하다. 대구한의대 김세기 교수도 "홈에 살짝 끼우는 것과 관통시켜서 부재와 석기를 일체화시키는 것은 결합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며 "이런 약점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 대구 별도끼를 무기나 생활도구로 보는 데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서변동 별도끼는 위신재설에 더 가까이 가 있다. 거의 공예품 수준의 완성도도 지휘봉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도끼의 홈 비밀도 '위신재설'로 접근하면 바로 풀린다. 생활도구로 쓰였다면 당연히 홈을 관통하여 결합력을 높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구를 관통시키지 않은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보통 위신재는 곤봉에 끼워진다. 결합, 부착 강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부족장 손에 들려지는 의전용 석부를 끼우는 데는 3㎝ 홈 하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위신재 아니다" '실용설'도 만만찮아=대구 별도끼가 생활도구나 무기로 쓰였다는 '실용설'도 만만치 않다. 실용설의 논리적 근거는 출토지다. 당시 49기의 집터가 발굴됐는데 그중 하나인 1호 주거지에서 발견됐다. 권력자의 가옥이나 무덤이 아닌 일반 민가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생활도구설'이 힘을 얻기도 한다.
실용설의 허점은 홈이 막힌 '반쪽짜리 석기'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모든 석기가 결합, 일체화가 완벽해야 하는 건 아니고 홈만으로 충분히 어떤 용도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서변동 성형석부의 비밀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모두 선사인들과의 문화 차이를 좁히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잘 알다시피 문명이나 문화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현대 문명이 반드시 선진(先進)은 아니고 최신 문화가 진실이나 상식에 가까운 것도 아니다. 부시맨의 콜라병 소동을 문화 지체로 보는 것도 비(非)문화적일 수 있다.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서변동 별도끼 용도. 부시맨에게 물어보면 바로 답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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