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切問而近思⑩-인문학적 정책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입력 2014-03-18 07:32:43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의 능동적 생산은 궁극적으로 '지식 외부'를 지향한다. 즉 앎과 삶의 일치, 나아가 삶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은 단지 책에서만 얻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책 밖에서, 책을 넘는 신체적 변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미숙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중에서)

고전문학을 좋아해서 대학원을 다녔다. 역사전기물을, 이규보를, 김시습을, 허균을, 박지원을, 판소리를 만나면서도 진정으로 행복하지는 않았다. 상아탑에서 이루어지는 지식의 생산은 바로 거기까지였다. 그런 지식이 의미가 없다기보다는 그냥 답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답답함의 근본적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젠 그 이유를 안다. 그건 바로 내 지식이 궁극적으로 '지식 외부'를 지향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전을 통한 지식이 단지 지식을 공유하는 우리들끼리의 문제였고, 삶의 새로운 가능성, 또는 앎을 삶으로 연결하는 전이성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근본적으로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인문학과 만난다. 인문학은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배우는 학문이다. 사람은 '지식 외부'에 존재하고 바로 그 '지식 외부'를 지향할 수 있어야 진정한 인문학을 만난다. 대상에 대한 좋다, 나쁘다는 판단은 정치적인 판단이다. 정치적 판단은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 이념, 가치관에 따라 현상을 해석하는 행위이다. 인문적 통찰은 그것을 뛰어넘는 행위이다. 시대정신을 읽는 과정이다.

인문학적 통찰은 대상에 대해, 또는 정책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정책은 도대체 본질이 무엇이며, 왜 그 정책이 현재 필요한가를 묻는다. 특히 교육정책은 좋다, 나쁘다의 기준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국민 모두가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이기 때문에 개개인이 자리한 위치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정치적 판단으로만 이해하면 갈등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그러면 정책의 방향은 어느 곳으로 향해야 할까? 먼저 나를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나만 바꾼다고 주어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가장 큰 변화는 관계에서 일어나야 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가 변화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관계의 변화는 배치와 소통에서 출발한다.

배치는 소위 조직표로, 소통은 지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조직표로 이루어진 배치, 일방적 지시로 이루어진 소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배치와 소통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이루어진다. 어울마당이나 축제를 통해 몸을 함께 하는 순간, 배치와 소통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은 뜻이 변화하면 떠난다. 하지만 몸을 함께 하는 사람은 결코 떠나지 않는다. 삶이라는 시간을 함께 걸어가기 때문이다. 몸이 뜻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교육정책은 대체로 정치적인 것이다. 당연히 좋다, 나쁘다는 판단이 쏟아진다. 문제는 교육을 담당한 주체들의 반응이다. 교육주체들은 좋다, 나쁘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고민해야 할 부분은 본질적인 영역이다. 정치적인 부분에서 이루어진 언어를 교육적인 차원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적 접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왜 그런 정책이 필요하고, 그런 정책이 학교 현장 속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 말이다. 발표된 정책은 정책의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해답은 교육현장에서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 해답은 아주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적 통찰이다. 교육정책이 인문학적 통찰을 만날 때 현장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다.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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