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노계 박인로 선생의 거처

입력 2014-03-14 10:41:55

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시인은 죽은 후에도 영지(領地)를 가짐을 알게 된다. 영국의 시성인 윌리엄 워즈워스에게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라는 아름다운 호수 지방이 영지이다. 그 지방에서 태어나 그 지방을 사랑하고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라스미어라는 마을에는 그가 살았던 아담한 집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있는데, 하얀 담장 위로 올라간 빨간 줄장미가 워즈워스의 시를 읊어주는 것 같다.

전남 보길도에 가면 고산 윤선도가 다가선다. 그는 그 섬에 연못을 파고 세연정이라는 날아갈 듯한 정자를 지었다. 담양 식영정(息影亭)에 올라가면 송강 정철의 시혼이 쉬고 있다. 담양에는 최근 멋진 한국가사문학관이 들어서 송강을 비롯한 그 지방 가사 시인의 작품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가사 시인이었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선생의 영지는 어디인가? '반중조홍가'와 '누항사'로 잘 알려진 노계 선생은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났으며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선생은 "처량한 빈집은 사람 없어 고요하고 어린 제비만 날 뿐인데, 옷이라고는 메추라기처럼 꿰매고 기운 누더기 옷"을 입고 지냈다.

노계 선생은 고산이나 송강과는 달리 손수 논밭을 갈아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소 한 마리 가질 형편이 못 되어 농사철마다 빌리러 다녔다. "여윈 소 한 마리 다행히 얻었으니/ 비 온 뒤에 봄밭을 달빛 받으며 갈리라." 아침나절에도 밭을 갈고 "낚시 마치고 돌아와 저녁나절에도 밭을 간다… 도롱이 삿갓 쓰면 빗속 밭갈이도 싫지 않다." 그러나 소를 못 빌렸을 때의 낙담이 '누항사'에 절절이 녹아 있다. 천둥지기 논에 겨우 물을 잡아 놓고 논을 갈기 위해 늦은 밤에 소를 빌리러 간다. 굳게 닫은 문밖에서 오래도록 아함, 아함 한 후 염치없이 또 소 빌리러 왔다고 하니 소 주인은, 이웃집 사람이 기름에 튀겨 낸 목 붉은 꿩과 잘 익은 술을 가져와서 함께 마셨기에 참으로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온몸에 맥이 빠져 버린다. "헌 모자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에/ 맥없이 물러나오니/ 풍채 작은 몰골에 개 짖을 뿐이로다/ 달팽이집 같은 방에 들어간들 잠이 와서 누웠으랴/ 북창을 비껴 앉아 새벽을 기다리니/ 무정한 뻐꾸기는 이내 한을 돋울 뿐이다."

선생은 또 평생 낚시를 즐겼다. 아름다운 금호강에서 한 천렵 놀이가 '소유정가'(小有亭歌)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강물이 하도 맑아 "깊은 돌이 다 보이니 고기 수를 알겠노라/ 고기도 낯이 익어 나를 보고 반기는가/ 놀랄 줄을 모르거든 어찌 차마 낚을쏘냐." "가을 달이 강에 가득 차 밤빛을 잃었거늘/ 반쯤 취해 한가로이 읊으며 강상을 건너오니/ 물 밑에 잠긴 달은 또 어인 달인 게요/ 달 위에 배를 타고 달 위에 앉았으니/ 문득 의심은 월궁(月宮)에 올랐는 듯… 아해야 닻 들어라 만조에 띄워 가자." 도가적인 흥겨움이 천만 갈래 시심으로 흩어지는 대목이 아닌가.

노계 선생의 생가는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괴화말 골목 안에 있는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폐가처럼 보인다. '도천'이라는 개울이 괴화말 남쪽에서 들어와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하천 바닥에는 아직도 갈대가 금빛으로 일렁인다. 원래 그 동쪽 산비탈에 도계서원이 있었지만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조그마한 서원을 선생의 묘소 근처에 일으킨 것은 1970년의 일이다.

도계서원을 찾아가면 매번 노계 선생 후손 박병관 씨와 종손 박정환 씨가 바쁜 농사일을 그만두고 달려와 서원 문을 열어 준다. 오히려 찾아간 사람이 미안해진다. 우리는 온갖 전통문화를 다 발굴하여 발전시키고 일부는 유네스코에 얹어 온 세계에 알리기까지 하는데 유독 노계 선생만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생가는 잡초로 덮여 있고 그의 서원에는 방문객을 위한 그 흔한 정자 하나, 벤치 하나 없다. 매번 멀뚱히 서 있다 올 뿐이다.

도천리에 번듯하게 노계가사문학관을 지을 일이다. 검단동에는 '노계공원'을 만들어 '소유정가'를 음미하는 대구의 대표적인 문학 순례지로 만들 일이다. 우리 지방이 문화적 보배를 알아보지 못하니 전라도 담양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울 뿐이다. 노계 선생이 돌아가신 지 400년이 다 되었지만 영지는커녕 선생의 거처마저 변변치 않다.

박재열/시인·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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