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세상 별난 인생] 고령 내곡미술촌 촌장 윤명국 씨

입력 2014-03-13 14:03:42

행위예술에 푹 빠진 조각가 "관객 소통 실감나요"

내곡미술촌(경북 고령군 고령읍 낫질로 315) 윤명국(50) 촌장.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마당쇠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배우 이대근을 닮았다. 눈빛이나 몸짓 등 생김새도 닮았고, 툭툭 내뱉는 말투도 닮았다. 힘도 세다. 실제로 그는 몸으로 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머슴같이 일한다. 하지만 그는 겉모습과는 달리 예술혼이 활활 불타오르는 예술가다. 주업인 조각보다 행위예술에 더 열심이다.

◆조각가, 퍼포먼스에 푹 빠지다

윤 씨는 영남대학 미술대학 조소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전공은 조각. 그러나 그는 조각보다 퍼포먼스(행위예술)에 더 관심 있고 더 열심이다. 푹 빠져 산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대학 시절, 그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에게 관심 두는 이는 없었다. 알아주는 이 없으니 작품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작품을 하기도 싫어졌다. 소통을 실감했다. "관객과 만날 수 없으니 작품을 할 의욕도 없고, 하기도 싫었어요."

1980, 90년대. 당시 백남준이 인기였다. "아, 이것이구나. 관객의 이목을 끌 만한 것이 필요하구나. 그래서 퍼포먼스를 하게 됐어요."

윤 씨는 작대기 끝에 분필을 달아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선을 그었다. 흰색, 파랑, 붉은색 분필 등 여러 가지 색으로 이리저리 그었더니 '흔적'이 남았다. 애쓴 흔적이 또렷이 보였다. "호작질(손장난)한다며 크게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얻은 것이 있었다. "우선 재미있잖아요. 현장감도 있고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현장에 작가와 관객이 함께 있으니 피드백이 빨라요."

사회문제를 작품화했다. "당시 우루과이라운드(UR)가 이슈였는데, 그와 관련한 퍼포먼스를 해보였어요. 옷을 훌러덩 벗고 온몸에 페인트를 칠하고는 저항의 의미로 도끼로 나무를 찍는 행위를 연출했는데, 꽤 반향이 컸어요."

그 이후로 윤 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초청하는 기관도 늘어났다. "데뷔한 거죠. 여기저기서 초대장이 날아왔습니다." 대학은 물론 부산바다미술제, 서울 인사동, 남한산성 등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호응도 좋았다. 조각가보다 행위예술가로 이름이 더 알려진 것이다.

6, 7년 전부터는 독도 퍼포먼스도 해오고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퍼포먼스인데, 고령 5일장을 비롯해 김천역, 전남 광양 등에서 퍼포먼스를 했어요. 독도 퍼포먼스는 아직 에너지가 남아 있어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계획입니다."

내친김에 2008년부터 '고령국제행위예술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미국과 호주, 일본, 프랑스 등 참여국이 몇 나라 되지 않지만 명실상부한 국제적 행사다. 윤 씨가 기획하고, 초청 경비와 운영비 또한 윤 씨 혼자 부담하고 있는 행사다. "항공료와 행사비 등 경비 마련이 힘들지만 계속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내곡미술촌으로 귀향

현재 윤 씨가 살고 있는 내곡미술촌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것이다. 고즈넉한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미술촌 정원에는 30여 점의 윤 씨 작품이 있다. 풍경을 돌로 형상화한 작품도 있고, '아버지와 아들' 작품도 눈길을 끈다. 문경석에 조각한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는 아버지와 아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지만 보면 볼수록 친근감이 가는 작품이다. 윤 씨의 작품은 누구나 만져볼 수 있다. "소통이라면 소통이죠. 작가와 관객과의 소통, 뭐 이런 것이죠. 예술가랍시고 '에헴' 하고 있으면 누가 거들떠보기라도 합니까. 소통이 돼야 발전이 있죠."

윤 씨 부부는 이곳에서 17년을 살았다. "1997년 내곡초등학교가 폐교되면서 지인의 소개로 이곳에 들어왔어요. 회화와 목공예, 조소 등 7, 8명이 같이 작업했는데. 하나 둘 빠져나가 이제는 저희 가족만 남게 됐다"며 "돌 지난 큰애와 6개월 된 둘째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 애들이 벌써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됐어요."

같이 생활했던 작가들이 빠져나가면서 윤 씨 부부는 자신들의 공간을 조금씩 넓혀 나갔다. 지금은 1층엔 작업실과 전시실, 2층에 살림집을 마련해 두고 있다. 윤 씨는 자랑스럽게(?) 집 자랑을 했다. "살림집과 작업실 등 우리 가족이 쓰는 공간이 600㎡ 정도 된다. 이렇게 큰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 봤느냐? 집 앞에 펼쳐지는 정원도 크고, 아이들이 뛰어놀고도 남을 만한 운동장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부자"라고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인 황현순 씨(서양화가)는 "처음에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해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이해하고 살아요. 저도 많이 변했거든요.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여유롭게 살면 되죠. 뭐. 시골 생활하면서 욕심이 없어졌어요. 욕심이란 게 끝도 없는 거잖아요."

◆또 하나의 꿈

윤 씨는 이곳에서 또 다른 꿈을 키우며 살고 있다. 내곡미술촌을 '주민미술촌'으로 만들겠다는 꿈이다. 혼자의 힘으로 힘들다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공동으로 다양한 장르의 예술공간으로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그는 "20년 가까이 시골에서 살아보니 자연은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다시 꿈을 꾸게 해줘요. 물론 퍼포먼스도 계속할 겁니다."

사진 박노익 선임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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