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력 지속시키려 쉴새없이 사업 도전…삼성의 시작은 사명감"
꼭 76년 전 이맘때인 1938년 3월 1일. 대구 중구 수동(지금은 인교동)에 만 28세의 청년 사업가가 나타나 가게 문을 열었다. 지하 1층'지상 4층, 826㎡(250평) 규모. 당시 서문시장 인근 점포로는 제법 컸다. 인근 상인들은 모두 놀랐다. "저 젊은 친구 도대체 누고?"
간판에 걸린 상호는 '주식회사 삼성상회(三星商會)'. 대한민국 경제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고(故)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1910~1987)이 '경제 거인'으로서의 본격적 행보를 대구에서 시작한 것이다.
대구를 삼성의 출발 지점으로 삼았던 그는 창조의 리더십을 보여준 기업인이었다. 삼성을 '창조'한 호암은 눈감는 날까지 폭주 기관차처럼 거침없는 기업 창조의 삶을 살았다. 그가 써내려간 삼성의 역사는 우리나라 경제사인 동시에 대한민국 발전사였다.
◆'부잣집 도련님'에 머무르지 않았다
호암의 고향은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다. 그의 집안은 중교리의 대지주로서 대대로 내려오는 천석꾼이었다.
호암의 학창 시절을 살펴봐도 그가 부잣집 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열 살 때까지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경남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나 유학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호암은 지수보통학교를 1년만 다니고 서울 수송보통학교로 옮겼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서울 유학'을 호암은 할 수 있었다. 수송보통학교는 대단한 학교였다. 일제가 초등교육 시범학교로 세운 곳이었다.
서울의 중동중학 속성과(보통학교 5, 6학년 과정)로 건너뛴 호암은 중동중 재학 도중인 1926년, 고향에서 혼례를 올렸다. 학업과 결혼 생활을 병행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집안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만하다.
1930년 호암은 바다 건너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입학했다. 진주-서울-일본 도쿄로 이어지는 유학 생활이었다.
"그 무렵 도쿄에서는 한 달에 50원만 있어도 5, 6명의 가족이 중류 이상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집에서는 어김없이 매월 200원의 송금이 있었다." 호암이 회고한 것처럼 그는 일본에서도 넉넉하게 유학 생활을 했다.
몸이 좋지 않았던 호암은 2학년 가을,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몇 년을 집에서 쉬기도 했던 호암은 사실 넉넉한 재산을 갖고 고향에서 편안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모두 현금화, 마산으로 나갔다. 사업 행보의 시작이었다.
◆창조 행보에는 쉼표가 없다
호암은 1936년 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차리고 도정업을 시작했다. 2년 만에 이익을 내기 시작한 호암은 이후 운수업에까지 손을 댔고 주머니가 두둑해지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토지 투자였다. 은행 융자를 받아 시작한 토지 투자 사업은 시작한 지 1년 만에 덩치가 커져 호암은 순식간에 660만㎡(200만 평)를 가진 대지주가 됐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토지 가격이 폭락하고 은행 대출 회수가 시작됐다. 정미소와 운수회사를 모두 처분하고 나서야 부채를 청산할 수 있었다.
남은 재산을 챙겨들고 그는 대구로 왔다. 무역업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대구는 근교 청과물과 동해안 건어물을 쉽게 받아올 수 있는 물류의 중심지였고 그는 대구권에서 수집한 물건을 중국으로 수출했다.
자본금 3만 원으로 시작한 수출업은 잘됐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내 국수 제조업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초라하지만 호암의 첫 제조업 상품은 국수였다.
상표는 '별표국수'였다. 당시 대구엔 5개의 국수 공장이 있었지만 삼성상회가 만든 별표국수가 가장 큰 인기를 끌었다. 가격은 다소 비싸도 맛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국수는 나무 상자에 담아 6관짜리와 12관짜리 두 종류로 판매했는데, 대구 시내보다는 오히려 인근 지방에서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대구 시내에는 6관짜리를, 인근 지역에는 12관짜리를 주로 판매했다. 별표국수는 호암이 대구를 뜬 이후인 1960년대 말까지도 대구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이었다.
삼성상회는 호암의 탁월한 경영 능력으로 착실하게 성장했다. 호암은 삼성상회를 창업한 지 불과 1년 만인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 주류 제조업에도 뛰어들었다.
이처럼 창업 초기부터 그에겐 쉼표가 없었다. 조선양조도 큰 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호암은 대구에 나타난 지 2년 만에 대구권 고액 납세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제일제당'제일모직 등의 경공업에서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최첨단산업 진출까지, 대구에서 본격 출발한 호암의 '삼성 기차'는 정거장이 없었다.
◆젊은이들이여, 안일(安逸)을 혐오하라
'내가 만약 부만을 위해 살았다면 (삼성 최초의 대규모 제조업체인) 제일제당만으로도 충분히 자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국민경제를 위한다는 신념만을 관철시키려 했다면 자유당 시대를 거쳐 민주당 시대, 그리고 5'16 이후에 이르기까지 칠난팔고(七難八苦) 끝에 완성시킨 한국비료와 함께 은거하여 유유자적의 나날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욕이 엇갈리는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사명감을 확인하고 또 언제까지나 청신한 창조력을 지속시켜 나가기 위해 쉴 사이 없이 사업을 벌여나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내가 언제나 안일을 혐오하고 도전과 시련을 반겨왔던 것도 이런 때문이었던 것 같다.'(1976년 6월 서울경제신문 '재계회고'에 실린 호암의 글)
그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미 돈을 많이 벌어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왜 어려운 길을 가느냐"는 것이었다.
삼성상회 개업 초기부터 그랬다. "무역이 잘되는데 왜 국수냐? 국수가 잘 팔리는데 또 양조장이냐." 호암의 귀에는 항상 이런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는 이런 말들을 한마디로 끊었다. "나는 안일을 혐오하며 창조가 행복이라고 항상 생각합니다."
최경철기자 ko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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