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란 말은 정치에 자료(참고)가 된다는 뜻이고, '통감'은 '통사'(通史)라는 뜻이다. 원래 '감'(鑑)은 거울이다. 동양에서는 역사를 상징한다. 그래서 통감은 제왕의 통치에 이용하기 위한 역사라는 뜻이 된다. 유교문화권에서는 과거 절대 왕정 시대에 왕이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고심한 나머지 과거 사례를 참고하려 했는데 역사서가 중시됐다.
최초의 통사는 사마천의 '사기'다. 기전체(紀傳體) 서술 방식을 썼다. 그러나 자치통감은 편년체(編年體)로 썼다. 기전체는 제왕의 연대와 계통을 세우고,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한다. 편년체는 날짜순으로 사건을 기록한다. 다만 날짜 순으로 적으면 어떤 사건의 전후 맥락을 알 수 없으므로 날짜 순으로 적되 중요한 사건은 전후 맥락을 소급해 적어 총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의 '실록'(實錄)은 편년체로 썼다. 역시 전후 맥락을 간간이 적어 전체 개요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이를 보완한 것이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다. 사건의 전후본말을 자세히 적었다.
자치통감이 다룬 시기는 동주(東周'주 나라 후반기)의 위열왕(威烈王) 23년(기원전 403년)부터 후주(後周)의 세종 6년(959)까지 1천362년간이다. 위열왕 23년은 왕이 진(晉) 나라의 경(卿)이었던 한건(韓虔), 위사(魏斯), 조적(趙籍) 3인을 제후로 봉해 각각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로 분열시킨 시기로 역사상 큰 전환기를 맞이한 때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천하가 분열돼 5대10국의 시대가 됐는데 그때 마지막으로 멸망한 왕조가 후주이므로 자치통감은 송나라 통일 이전(당나라 말)까지의 시기를 다룬 것이다.
자치통감의 지은이는 송나라 때의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다. 당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새 제도개혁)에 반대한 구법당의 지도자였다. 당시 왕 신종이 왕안석의 신법을 채용하자 보수적인 사마광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는 자신의 포부를 역사를 통해 표현하려 했다. 무려 19년을 걸려 자치통감을 완성했고, 처음으로 통사(通史)라 지칭해 신종에게 바치니, 신종은 정치에 크게 참고된다며 서문을 쓰고, 책명도 자치통감이라 고쳐줬다. 모두 294권의 엄청난 분량이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년체로 기술한 이유는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술하려는 그의 역사관 때문이다. 남송시대 주자(朱子'주희)는 이 책의 분량이 너무 많아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139권)을 편찬했다. 송 휘종 연간에 나온 강지(江贄)의 '통감절요'(通鑑節要)(50권 15책)는 자치통감의 분량을 더욱 줄인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한문 초학자들의 강독용으로 많이 읽히고 있다.
이동희 계명대 윤리학과 교수 dhl333@km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