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는 이상적 인물, 세속적 욕망 품은 마동탁이 실제 저와 가깝죠"
"누구나 자신이 진정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다만 그 일에는 숨 막히는 경쟁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나는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 실패한 사례는 맹세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처럼 '색약'(色弱)인 사람이 만화가가 되고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때문이었다."
만화가이자 교수인 이현세(58'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씨가 친숙한 만화가 아닌 '인생이란 나를 믿고 가는 것이다'라는 에세이집을 들고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이 화백이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 시대에 횡행하고 있는 '힐링'과 치유가 아니었다. 아프다고 더 이상 징징거리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서 뚜벅뚜벅 걸어가라는 '독려'와 채찍질이다.
"젊은이들이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은 병이 아니다. 극복하는 것이 당연한데 스트레스라는 '망할 놈의 말'이 나오면서 심각해진 것처럼 여기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0대 젊은이들에게 '너희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근거라고는 전혀 없지만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자기 확신'이 있어야만 가는 길이 덜 무섭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올여름 '웹툰'(webtoon)에 도전한다. 만화가게가 사라져 버린, 인터넷 외에는 만화를 실어주지 않는 시대에 그가 선택한 새로운 무대다.
그는 또 세계 최대 만화축제인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국내작가 20여 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작품들로 구성된 '위안부 전시회'를 조직, 국제사회에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환기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만화에 대해서는 스스로 '오만할 정도'로 확신을 하고 만화를 그려온 그가 문하생 시절을 거쳐 '만화가 이현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공포의 외인구단'(1982년) 때부터였다.
-만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나서 불안한 미래가 걱정되지 않았나.
"아주 불안한 미래였다. 딱 한 사람 나만 빼고는. 나는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지 않았다. 애초부터 (만화가로) 성공하는 것은 염두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 다만 만화를 그려서 아내와 아이들과 밥만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있었다. 문하생 시절에는 사람들이 모이면 꿈과 좌절, 청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거기서 피해의식에서부터 필요 이상의 자부심, 그 시대에 누구나 했던 비판정신 등 모든 것들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만화를 그려서 결혼할 수 있고 아이들을 키워서 밥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다른 작가들과는 많이 달랐다.
"당시도 다른 작가들은 무엇을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캐릭터를 가질까가 고민이었다. 나를 대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했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여전히 가변적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나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까치(오혜성)와 마동탁이라는 인물이 된 것이다. 마동탁이 세속적인 내 욕망을 대변한다면 까치는 내가 행동할 수 없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그렇게 (한 사람을) 갈라놓은 것이다. 실제는 마동탁이 나와 훨씬 가깝지 않겠나. 돈 벌어 잘 살고 싶고, 예쁜 여자와 데이트하고 싶고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그런 모든 세속적 욕망이 나한테도 있고 마동탁한테도 다 있다. 반대로 까치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상과 목적을 위해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지만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을 까치에게 준 것이다. 그 둘은 빛과 그림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을 알았고 만화를 좋아했지만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 때문에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보다 미대(美大) 진학을 꿈꿨다. 그를 만화가의 길로 이끈 것은 '색약'이라는 복병이었다. 미대 입시 원서를 내면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적록색약 판정을 받게 되면서 미대 진학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 당시는 만화를 보다가 걸리면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고, 만화가게를 하는 사람도 사람답게 보지 않을 정도로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 시절에 만화를 그리는 '원흉'이 되겠다는 것은 참 어려웠다. 미대 진학이 불가능해지자 '그림밖에 안 했는데… 아, 만화 그리는 것이 운명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를 위로해 준 것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었다. 누구에게나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만화냐 회화냐를 선택해야 할 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꽤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만화가는 욕먹는 사람이니까 전과자가 될 각오를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운명의 벽을 만났을 때 맞서는 사람도, 주저앉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벽을 눕히면 길이 된다'는 말처럼 운명의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래 이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이구나' 하고 운명이 이끄는 방향으로 모험하는 사람이었다."
1978년 베트남 전쟁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공식 데뷔한 이현세는 '공포의 외인구단'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아마게돈' '남벌' '천국의 신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잇따라 히트시키면서 만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그림뿐 아니라 스토리도 직접 짜는가.
"예전에도 내가 다 하지는 않았다. '외인구단'도 내가 스토리를 짠 것이 아니다. 당시 '삼미슈퍼스타즈'라는 프로야구팀이 제7구단으로 만들어졌는데 별명이 도깨비, 외인부대였다. 용병을 그러모아서 만들었는데다 게임도 장명부 투수가 나오면 12대 0으로 이기다가 나머지는 콜드게임으로 지곤 해서 도깨비팀이라고 불렸다. 그때 스토리를 쓰는 친구랑 뜻이 맞아서 까치와 마동탁 등 정형화된 캐릭터를 살려서 내놓은 것이 이현세 만화의 시작이자 캐릭터 만화의 시작이다.
작가는 매번 스토리에 맞춰 캐릭터를 바꾸는 경우와 나처럼 장르와 상관없이 까치와 엄지가 다 들어가는 두 종류가 있다. 그 전에도 캐릭터 만화를 그리는 이상무 화백의 '독고탁' 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나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허영만 화백도 강토가 있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까치와 마동탁 등의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자전적 이야기인 '오계절'에서 '까치'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졌고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국경의 갈가마귀' '날아라 까치야' 등을 통해 까치의 성격과 '마동탁'과 '엄지'라는 주요인물들이 정형화됐다. 캐릭터가 완성되고 난 후 '외인구단'이라는 만화가 탄생했다. 그때는 만화가로서 독립도 했고 결혼도 했다. 나는 내가 잘나서 캐릭터를 완성했다고 하지만 아내는 자기와 결혼해서 그랬다고 우긴다."
이 화백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엄지'라는 캐릭터는 그의 아내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웹툰을 시작할 계획이라는데.
"학습정보만화를 하면 웹툰을 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동안 한국사, 세계사, 삼국지 등을 하는 데 10년 정도가 걸렸다. 이제 창작만화를 하고 싶었는데 특별히 연재할 만한 곳이 없어졌다. 서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웹툰을 잡을 수밖에 없다. 약간 말이 안 맞을지는 모르지만 포털이라는 공간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기존의 웹툰 스타일을 따를지 말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포털이라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지만 서사적인 남자의 로망을 이야기할 것이다. 남자의 로망을 갖고 시대를 옮겨보려고 한다. 웹툰 작가들이 10, 20대를 팬으로 한다면 나는 40, 50대를 팬으로 하고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팬층이 확산하면 40, 50대 영혼들을 위로하는 일부터 하려고 한다."
-만화책 시대가 어느 사이 웹툰 시대로 전환됐다.
"만화책은 전 세계적으로도 쇠퇴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종이만화는 작가의 상징 정도로 남아 있다. 창작만화 시장이 죽으면서 웹툰 시대로 전환됐다. 이는 만화대본 시장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간 것이라고 보면 된다.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빌려보다가 지금은 인터넷에서 무료로 보거나 약간의 돈을 내고 보는 것이다. 한국 만화시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여대본 시장이라는 속성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다. 이 시장의 변화를 만화 쪽 사람들은 미처 읽지 못했다.
그래서 만화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하는 사람들이 웹툰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고 우리는 전멸하다시피한 것이다. 당시 기성작가들은 대본소를 죽이고 서점시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IT가 빨리 진군해 들어오면서 어느 날 작가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다. 절대로 공짜로 보여줄 수 없다고 그 시장을 거부했는데 원고료를 안 받아도 내 만화를 그리고 싶어하는 웹툰 작가들이 시장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공짜는 안 된다는 작가적 자부심이 강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만화 역시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정치적인 이슈들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가.
"많은 작가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많은 작가가 진보에 서는 것을 선호한다. 모든 창작자들이 젊은이 편이고 진보에 서왔다. 또 밥벌이를 위해 진보 쪽에 서는 사람도 많다.
안타까운 것은 미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용감하고 멋있는 보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찾고 싶은 것은 탐욕스러운 보수가 아니라 인간미 넘치는 당당한 보수의 모습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모습이 있다면 시대를 책임지고 젊은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자기의 존엄한 죽음까지도 책임지는 보수다."
서명수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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