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거인(巨人)에게 길을 묻다] 제1부 박정희 대통령 7)위기를 기회로 활용

입력 2014-02-17 07:29:30

적화 위협에 새마을운동·중화학 육성…두 전략이 결국 북한 눌렀다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끝까지 생존하는 종(種)은 강하고 두뇌가 좋은 종이 아니라 변화에 잘 적응, 대처하는 종이다"라고 했다. 이 명제는 비단 생물학에서뿐만 아니라 큰 조직체인 국가(國家)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위기나 변화가 닥쳤을 때 잘 대처하는 나라만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18년여 집권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위기 돌파에 탁월한 모범을 보였다.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것이 위기라고 봤을 때. 위험을 극복하고 기회를 적극 활용해 국가 발전을 이뤄낸 것이다.

◆국가 방향을 바꾼 대전략, 월남 파병

1961년 11월 14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했다. 이 정상회담의 기록은 얼마 전에야 공개됐다. 이 자리에서 박 의장은 월남(越南) 파병을 거론했다. "한국은 월남식의 전쟁을 위해서 잘 훈련된 100만의 장정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한국 정부는 월남에 이런 부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고, 정규군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군을 모집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조치는 자유세계가 단결되어 있음을 과시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지 못해 월남 파병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당시 미국의 원조를 받는 입장에서 케네디 대통령에게 들이밀 카드가 별로 없었던 박 의장이 고심 끝에 낸 것이 월남 파병이었다. 연 파월 병력 30만 명, 최다 주둔 병력 5만 명을 기록한 첫 해외 파병의 씨앗이 이때 뿌려진 것이다. 박 의장은 같은 자리에서 원조를 요청하면서도 무작정 달라고 하지 않고, 자립(自立) 의지가 있는 나라에 우선적으로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란 논리도 폈다. 박 의장은 농민들을 상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자조 정신을 강조하곤 했었는데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에 대하여도 당당하게 손을 벌리려고 했다.

월남 파병은 대한민국의 방향을 전환한 대전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군을 월남에 파병함으로써 주한미군 병력을 빼내 월남 전선으로 보내려는 미국의 구상을 중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파병에 따른 대가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얻어냈다. 주한미군 감축에 따른 위험을 막는 것과 동시에 월남 파병을 통해 대한민국 발전의 기회를 붙잡은 것이다. 월남에 갔다 온 연 30만 명의 국군은 실전 경험을 쌓았다. 건설업자들을 비롯한 우리 민간인들은 군인들을 따라 월남 시장에 진출해 많은 외화를 획득했고, 해외사업 경험을 얻어 1970년대의 중동(中東) 진출 때 긴요하게 써먹게 됐다. 이 같은 점들을 두루 살펴보면 월남 파병은 대한민국 발전의 기폭제가 됐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은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에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조국과 군을 위해 젊음을 바쳤고,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성장'발전할 수 있었음을 고해하는 심정으로 증거하고 싶다."

◆북한을 제치다

1960년대 말 북한 김일성 정권의 도전에 직면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건설과 국가 안보란 상반된 조건의 압박에 몰리게 됐다. 다른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박 대통령은 건설과 국방이란 상반된 조건을 다 살리면서 역사적 진전을 이루는 방향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갔다.

박 대통령이 1960년대 말 위기를 1970년대의 호기로 돌려세우는 데 있어서 취한 두 가지 가장 중요한 조치는 새마을사업과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경제건설 참모장' 역할을 했던 김정렴 씨에 따르면 두 사업 모두 김일성의 적화(赤化)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새마을사업을 통해서 공산주의자가 침투할 수 있는 빈곤을 없애고, 중화학공업 건설을 통해서 자주국방이 가능한 공업력을 갖추겠다는 계산이었다는 얘기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확실하게 북한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됐다. 대한민국의 거대한 전환, 즉 후진국으로부터 선진국을 향한 중진국으로, 경량급 국가에서 중화학 공업력을 지닌 중량급 국가로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고 남북 간 힘의 역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위대한 역전과 전화위복이 김일성의 도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66년 2월 15일 대만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장개석 총통이 주최한 만찬에서 북한 위협을 이겨내는 것은 물론 나아가 자유 통일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피력했다. "혹자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머잖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통일은 대박'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이 북한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0년대 북한의 위협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남북한 차이를 확연히 벌린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중동에서 국가 도약을 이루다

행운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 오일쇼크가 전 세계를 덮친 197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에도 이 법칙이 들어맞았다. 중동 진출을 통해 한국은 터널을 지나 새로운 무대로 진입하게 됐다.

박 대통령은 "오일쇼크로 인한 외환위기는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동 진출 관련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국내 업자들을 불러 설명회를 개최하고 중동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뜻을 전하라"고 독려했다. 이에 당시 오원철 청와대 경제2수석 비서관은 이렇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각하,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우수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동은 작업환경이 가장 나쁜 곳입니다. 고온이고 사막지대입니다. 오락도 없는 곳입니다. 이렇게 나쁜 조건이야말로 우리나라에게는 극히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우리나라에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수십만 명의 제대장병들이 있습니다. 월남에서의 경험도 있습니다. 각하 에너지 위기는 국난의 일종입니다. 한국 남아가 국난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어린 여공들이 수출을 해서 우리 경제를 지탱해왔습니다만, 이번에는 남자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둘째 우리나라 남자 기능공들의 인건비는 선진국보다는 훨씬 싸고 기술 수준은 후진국보다 월등합니다. 셋째 공기 단축인데 이 부문은 우리 건설업체가 자신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식으로 돌관 작업을 하는 데 소질이 있습니다."

1973년에 한국업체들은 중동에서 2천400만달러의 공사를 수주했다. 중동 진출이 본격 시작된 1974년엔 8천881만달러, 1975년엔 7억5천121만달러, 1976년엔 24억2천911만달러, 1977년엔 33억8천700만달러, 1978년엔 약 80억달러, 1979년엔 약 60억달러, 1980년엔 약 80억달러, 1981년엔 126억달러로 수주액이 가파르게 늘었다. 절정기인 1978년에 중동 진출 한국 건설 노동자는 14만2천 명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석유위기와 정면승부해 중동 진출로 한국 경제, 한국인의 새로운 활동영역을 창조해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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