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3000년경 대구 머문 조상, 이름부터 찾아줘야 하지 않을까
1977년 평양시 역포 구역 대현동 동굴 유적에서 인골이 출토됐다.
'역포인'(力浦人)으로 불리는 이 화석은 도구나 유적이 아닌 자신의 신체 일부를 남겨 존재를 알린 한반도 최초의 인류였다. 김일성대 발굴단에 발견된 이 인골은 신생대 4기 무렵에 한반도에 거주했던 인류로 알려졌다.
남한에서는 충북 단양군 상시바위그늘과 청원군 두루봉 동굴 유적에서 3만~4만 년 전 고인류 화석이 보고되었다. 3만~4만 년 전이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직립원인류의 호모 사피엔스 계열이다.
남부지역에선 인류 화석 발굴 보고가 드물었다. 그러던 참에 2008년 달성군 평촌, 예현리 유적에서 대구 최초의 인골이 출토됐다. 청동기시대 석관묘, 옹관묘, 삼국시대 주거지 134기가 확인된 이 유적에서는 무려 석관묘 13곳에서 유골이 발견됐다. 대구 최초 인류의 발길을 따라 청동기시대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청동기시대부터 달성에 사람 거주=언제부터 달성군에 사람이 거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인근 달서구 진천동, 화원 천내리에서 청동기 토기, 간돌칼이 출토되었고 냉천리, 대일리, 금포리, 고봉리 등지에 지석묘가 분포하고 있어 청동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인골 유적이 발견된 곳은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와 예현리. 구지면 지역은 기존의 선사 유적 조사에서 지석묘군이 보고돼 달성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2004년 지방산업단지 도로 공사를 앞두고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첫 단추가 끼워졌고 인력과 장비 문제로 말미암아 본격적인 발굴은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하 경문연)에서 담당했다.
이곳에서는 석관묘 21기와 옹관묘 3기, 주거지 5기를 비롯해 삼국시대 주거지와 수혈 유구 등이 확인됐다. 석관묘는 판돌을 잇대 널을 만들어 사용한 무덤으로 지석묘와 함께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지 형태이다. 청동기시대 무덤, 집터와 철기, 원삼국시대 주거지가 시대를 달리하며 한자리에서 발굴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온전한 형태의 인골은 지역에서 한 차례도 보고된 바가 없었기 때문에 발굴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김찬영 경문연 책임조사원은 "인골 출토는 선사시대에 거주했던 인류의 실체라는 점에서 유전학, 인류학적 계통을 연구하는 데 직접적인 자료"라고 말하고 "발굴 당시 두개골부터 정강이까지 전체 인골이 한눈에 드러났으며 무릎과 팔이 약간 구부러진 굴장(屈葬) 형태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10여 개 유구에서 인골흔이 발견되었지만, 전신 형태의 온전한 유골 수습은 20호분이 유일했다.
◆출토 인골의 인류학적 특징=고고학적 처리, 감식을 전문으로 하는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는 경문연으로부터 인골의 인류학적 조사를 위탁받아 1년 6개월 동안 조사를 했다. 연구 목적은 인골의 나이 가늠, 남녀 구분, 신장 측정을 통해 인류학적 특징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조사 결과 전체 인골 15구 중 남녀 구분이 가능한 인골은 모두 10구로 이들 모두 남성으로 판정되었다.
김 책임조사원은 "판정 가능한 인골 모두 남성인 점으로 보아 나머지 인골도 남자일 가능성이 크다"며 "피장자들이 살던 시기는 남녀 신분이 분명했고 사후에도 매장, 장례 절차에 성별을 엄격히 구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신장 측정과 나이 가늠에서도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정강이, 사지 뼈가 온전하게 남아있어 키 재기가 가능했던 3호, 20호 인골을 조사한 결과 이들 모두 173㎝ 정도로 조사되었다.
당시 식생활, 영양, 주거 환경 등을 자세히 파악할 수 없지만, 이 정도 신장은 매우 건장했던 체구로 추측된다. 더구나 이 두 인골 모두 사지 뼈가 매우 굳세고 관절이 잘 발달해 있어 우수한 체격 조건을 갖춘 걸로 조사됐다.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고고미술사학)는 보고서에서 '출토 인골로 판단해볼 때 몸집이 크고 강건한 사람들로 추측된다'며 '석관묘에서 돌칼, 돌화살촉이 함께 출토된 점으로 보아 당시 지배 계층일 가능성이 크다'고 적고 있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두 사실을 종합해볼 때 당시 사회구조에선 우수한 체격 조건을 갖춘 전사(戰士)형 남성들이 지배계층을 형성했다는 점도 추측해볼 수 있다.
◆대구 최초 조상 이름 찾아주기=보통 고인류 화석은 발굴 지명을 따라 명명된다. 북경인, 자바(Java)인, 네안데르탈인 등 명칭이 출토 지명에서 유래한 것과 같은 이치다. 1980년 북한 평양 용곡리에서 인류 화석이 발견되자 '용곡 사람'으로 명명했고 1998년 청원 두루봉 동굴 흥수굴(발견자 이름이기도 함)에서 구석기시대의 어린이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 발견 지역의 이름을 따 '흥수 아이'라 이름 붙였다.
발굴 지역을 명확히 밝히고 지역의 최초 조상격인 인물을 존중하고 이름을 붙여 기념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지역에서 최초의 청동기 조상을 만난 지 6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름을 붙여 기념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BC 3000년경 대구에 머문 최초의 조상을 기억하는 일, 우선 이름부터 찾아줘야 하지 않을까. '평촌 사람'은 어떨까.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알려왔습니다=15일 자 13면 '달성군 평촌리 인골 출토' 기사에서 인터뷰 내용 중 '토양이 산성이라서 유골 보존이 가능했다'는 기사에 대해 대가야박물관 신종환 관장은 "유골의 보존성은 석회동굴이나 조개무덤처럼 강알칼리성 토양에서 훨씬 뛰어나다"고 견해를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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