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쇠를 끓여 부은 듯 붉은 진흙 해변, 그 뭉클한 해넘이
아름다운 것 뒤에는 슬픔이 묻어 있다. 우리나라 일몰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꽃지 해변의 할미 바위와 할아비 바위에도 서러운 사연이 숨어 있다. 그런 안타까운 이야기가 있기에 풍경은 더 신비하고 황홀하다.
천 년도 훨씬 더 전인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 시절에 승언(承彦)이란 장수가 이곳 견승포(안면도) 일대를 지키는 사령관으로 파견 나와 있었다.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완도)에 진을 치고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승언은 예하부대의 책임자였다. 장보고가 주재하고 있는 완도는 본부였고 전략적 전진기지로 이곳 견승포와 좀 더 북쪽인 장산곶이 있었다.
승언 장수는 부하들을 친형제처럼 아끼는 한편 사랑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에게는 미도라는 아리따운 부인이 있었다. 금실이 워낙 좋아 동네 사람들이 부러움을 넘어서 시기할 정도였다.
어느 날 '군선을 끌고 북쪽으로 진군하라'는 장보고의 명령이 떨어졌다. 승언 장수는 아내에게 "일을 마치고 빨리 돌아오마"고 말한 후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나아갔다. 몇 달이 지나도 소식 한 장 없었다. 아내는 아침만 먹으면 젓개산으로 올라가 사랑하는 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할머니로 늙어버린 미도 각시는 산꼭대기 바위 위에서 숨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할미 바위라 불렀다.
어느 깜깜한 밤, 조용했던 바다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더니 할미 바위 앞에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아내를 못 잊어하던 승언 장수의 혼이 바위로 변한 것이라며 그때부터 할아비 바위라 불렀다.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지고지순했던지 이곳 사람들이 꽃지 해변의 지명에 장수 이름을 갖다 붙여 지금도 안면읍 승언리가 이 동리의 이름이다. 바다도 연인들의 넋을 위로하느라 들물 땐 바다로 있다가 날물 땐 파도가 애무를 하며 물러나면 두 바위섬이 밑바닥까지 속살을 내보인다.
나는 오늘 오랜만에 꽃지 해변을 찾았다. 대문트레킹에서 태안해변 노을 길 12㎞(꽃지 해변~방포항~전망대~밧개 해변~두여 해변~ 창정교~기지포~삼봉 전망대~백사장 항 구간)를 걷는다기에 따라나선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동남서해의 바닷가는 두루 돌아보았지만 꽃지 해변만큼 아름답고 멋있는 곳은 없었다. 이 풍경을 사진으로 표현하면 구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역광일 때 두 섬의 실루엣은 감탄과 감격의 연속이다. 이런 기막힌 풍광을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너댓 시간을 달려와야 만날 수 있다는 게 심히 못마땅하다. 차라리 이사를 와버릴까.
오늘은 당일치기 여정이다. 놀 속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실 여유는 없다. 그렇지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불타는 듯한 일몰 풍경을 불러내 절 마당에 탱화를 걸듯 꽃지 바위섬 사이에 걸어두고 혼자 웃고 즐기면 그만이다. 이만한 풍류가 어디 있으랴.
서해 낙조는 신비로울 정도로 비경이다. 동해와 남해의 해넘이 풍경이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서해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썰물이 빠져나가 뻘밭 너머로 빠져버리는 붉은 해의 사라짐은 영화의 어떤 라스트 신보다 뭉클하고 감동적이다. 해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진흙 해변이 놋쇠를 끓여 부은 것 같이 주황으로 부글거리지만 'THE END'라는 자막이 뜨면 그 길로 깜깜한 정전이다.
꽃지 해변에서의 사유의 시간을 끝내고 지금부터는 달려야 할 시간이다. 태안군은 태안의 북쪽 끝인 학암포에서 남쪽 끝인 영목항까지 120㎞ 해변 길을 자연생태탐방로로 조성 중이다. 우리가 걸어야 하는 노을 길은 산과 바닷가 그리고 솔밭 오솔길이 두루 섞여 있어 네 시간 반이란 긴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이곳 안면도 바다는 물도 맑고 파도가 3겹 내지 5겹의 물 이랑을 이루는 동해의 축소판 같다. 연전에 원유 유출로 해안선 전체가 검은 기름에 오염되긴 했지만 이젠 완전히 회복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다.
삼십 리 해변길이 너무 아름다워 망막이란 필름 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밧개 해변 노을 집(041-673-1550)에서 먹었던 바지락 칼국수 점심도 칭찬하지 않으면 섭섭해 할 것 같다. 깍두기국물까지 놀 빛에 물들었는지 깔끔하게 맛있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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