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동심원·석관묘 한자리…청동기 원시 신앙 흔적 한눈에
돌은 철(鐵)보다 강하다. 적어도 고고학적 관점에서는. 부식과 산화(酸化)에서 자유로워 인류의 문명을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단단한 속성은 영원, 불멸과 연결되고, 부동(不動)의 미덕은 외경과도 통한다. 바위는 태양, 구름, 대지 등과 더불어 자연신의 하나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제의(祭儀)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선사시대 거석(巨石)문화는 대부분 원시 신앙으로 통한다. 고인돌은 사자(死者)를 매장하는 무덤, 선돌은 묘역이나 지역 수호신, 제단은 제사를 치르는 공간적 배경이었다. 이들은 모두 청동기 시대의 제의 유적으로 원시 신앙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다.
1998년 대구 진천동에서 입석(立石)이 발견됐다. 그냥 일반적인 묘표석(墓標石) 정도로 알았는데 발굴이 진행될수록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었다. 벽면엔 성혈(性穴)과 동심원이 선명하고 기반에선 석축과 제단의 윤곽이 드러났다. 주변에선 청동기 시대 대표 묘제인 석관묘 5기가 같이 발굴되었다. 매장, 제의, 제단, 암각화 등 원시 신앙의 흔적이 모두 한자리에서 나타났다.
◆자연에 대한 외경이 원시 신앙의 실마리=선돌 또는 입석은 길쭉한 형태의 자연석으로 선사시대 기념물 또는 신앙 대상물로 여겨진 유적을 말한다. 선돌은 세계 각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공통 유적. 특히 동아시아와 유럽 지역에서 밀집된 양상을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선돌은 고인돌보다 출토 수가 현저히 적다. 그러나 그 분포에는 한반도 전역에 미치고 있다.
선돌은 대체로 예배의 대상물이나 경계석 등의 성격이 짙지만, 그 형태 특성상 남근(男根), 정령(精靈) 숭배 같은 원시 신앙과 연결되기도 한다. 진천동으로 발길을 향하기 전 우선 원시 신앙에 대해 알아보자. 신앙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과 초자연적인 대상에 대한 경외가 전제되는 행위다. 내세관을 전제로 하는 매장의식은 기본적으로 영혼 불멸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종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원시 신앙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창(窓)은 농경문화다. 농업은 작업 특성상 날씨의 영향이 절대적이고 홍수, 가뭄과 같은 재해는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런 공포는 초자연적인 대상에 대한 외경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자각이 원시 신앙의 제의 행위로 표현됐다.
◆진천천, 낙동강 합류지점 위치=진천동 유적이 발견된 곳은 야트막한 하천변 충적지. 대덕산에서 발원한 진천천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비옥한 농경지와 하천이 인접해 어로와 수렵까지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하천변 구릉, 충적지를 특징으로 하는 청동기시대 주거 형태와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발굴 당시 선돌의 규모가 크지 않아 고인돌의 덮개석으로 추정했으나 조사 과정에서 기단석들이 확인되면서 제단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석축의 규모는 20×10m 범위. 가장자리를 'ㄷ'자 로 구획하고 내부에 입석을 세워 놓았다. 석축은 5단 이상 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의 트인 쪽에선 물길 흔적과 강자갈이 발견돼 하천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운용(고려대 고고미술사학) 교수는 "물가에 있는 제단은 지신(地神) 또는 수신(水神)에 제사를 지내던 공간으로 농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때 제사는 단순한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통치 행위까지 포함한다"고 말했다.
◆신앙의 진화, 다원화 입증=진천동 유적은 고대 신앙 차원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진화되고 분화가 이루어진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신석기 시대의 애니미즘, 샤머니즘 같은 초기 원시 신앙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우선 제단과 선돌, 묘제가 한 공간에 자리 잡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전의 지석묘나 선돌, 제단 유적들이 각자 독립된 영역에서 각자의 제한적인 위상을 가진 것과는 뚜렷하게 비교된다.
이런 묘역의 신성화, 제단 제의 같은 의례 행위는 종래의 단순한 기복 행태에서 벗어나 점차 신앙이 다원화됨을 뜻한다 하겠다. 이상길(경남대 사학과) 교수는 "청동기 시대는 다양한 신앙적 세계관이 펼쳐지는 시기였다"며 "종전의 자연 숭배, 토테미즘 같은 원시 신앙에서 대지신, 조상신, 농업신 같은 기능신으로 신앙적 개념이 확대되었다"고 주장했다.
◆성혈, 동심원이 담은 메시지=진천동 유적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건 선돌에 새겨진 문양(紋樣). 벽면엔 5개의 성혈과 동심원이 그려져 있다. 동심원은 주술적이고 상징적인 모양이나 기호로 당시 거주인들의 정신세계나 미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고대 신앙의 단면을 읽을 수 있는 유적이다.
발굴에 참여했던 이재환(경북대박물관) 연구원은 "일반적으로 동심원은 태양이나 인물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며 "고령 양전동 암각화와도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두 유적 간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홈 구멍으로 불리는 성혈은 주로 고인돌의 덮개석이나 자연 암반에 주로 새겨진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 중앙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도 확인되는 보편적인 유적이다. 구멍들은 주로 여성 성기나 곡물을 암시하며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천동 입석은 당시에 처음 발견되었다기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자연석처럼 뒹굴다가 발굴과 함께 세상에 알려진 형태다. 길이 1.5m, 폭 1.1m, 높이 2.1m 장방형의 바위이다. 사료적 의미와 비교하면 웅장한 규모가 아니고 모양도 수려하지 않다. 그저 그런 바위 중 하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돌은 지역의 선사인들이 그들의 기원과 세계관을 담아 초자연적 대상과 소통했던 작은 창(窓)이었던 것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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