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 그리고 그들의 아내였던 김향안
지난해 늦가을 덕수궁엘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는 '명화를 만나다, 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이 열리고 있었다. 이중섭의 '소'와 박수근의 '빨래터'를 보고 싶었다. 구본웅이란 꼽추 화가가 천재 시인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과 김환기가 그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두 개의 그림을 오버랩 형식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두 그림은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둘 다 서양화지만 장르를 따지면 하나는 '초상'이며 다른 하나는 '추상'이다. 두 그림 사이에는 마하리아 잭슨이 부른 흑인 영가 '깊은 강'(Deep river)보다 더 깊은 무엇이 흐르고 있었다.
'친구의 초상'은 권태를 느낄 정도로 어둡고 칙칙하다. 허무주의자들이 만든 '니힐리즘'이란 잡지의 표지처럼 우울하고 섬뜩하다. 폐결핵을 앓는 시인의 창백한 피부 빛이 광기마저 느끼게 하는 안광에 투사되어 서러운 기운이 화폭 깊숙이 서려 있다.
일찍이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에서 보여준 난해하면서도 가학과 자학이 범벅이 되어 조소로 가득 찬 화가의 내면 풍경이 곳곳에 스며 있다. 또 식민지 시대의 희망 없는 미래와 요양차 갔던 황해도 백천 온천에서 만난 금홍이란 기생과의 가망 없는 동거, 그리고 한 번도 부유해본 적 없는 가난이 그림의 배경이 된 검은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그림은 애절하고 그리운 정이 화폭 속에 알알이 박혀있다. 화가의 고향은 목포 앞바다의 안좌도라는 섬이다. 그는 어릴 적 바다를 보며 자랐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란 그림은 뉴욕 생활에 권태가 깃들 무렵 김광섭 시인이 소포로 부쳐준 '저녁에'란 시를 읽고 그걸 소재로 그린 것이다. 시 한 편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고향을 떠올려 준 것이다.
그는 큰 캔버스를 끄집어내 점을 찍고 그 속에 바다를 그려 넣었다. 화가는 하루 16시간씩 작업하면서 출렁이는 파도와 별빛과 달빛을 투사시켰다. 그 외에도 보고 싶은 고향 산천과 눈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들을 그려 넣었다.
화가의 아내는 재혼으로 얻은 김향안이다. 그녀는 시인 이상의 아내였다.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다닌 신여성 중에서도 뛰어난 재원이었다. 스무 살 때 여섯 살 많은 이상과 결혼했으나 이상은 4개월 만에 요절하고 말았다. "결혼 4개월 동안 낮과 밤이 없이 즐긴 밀월은 월광(月光)으로 기억할 뿐"이라며 이상을 추억하곤 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었고, 김향안의 본 이름은 변동림이었다. 딸 셋을 둔 김환기와 결혼하면서 변동림이란 이름을 버린 것이다. 변동림은 화가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의 배다른 동생이다. 시인과 화가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두 남편들이다. 자매의 남편들을 동서라 부른다. 그러고 보니 변동림의 남편 이상과 김향안의 남편 김환기도 동서지간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서두에 '두 그림 사이에는 깊은 강이 흐른다'고 말한 저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덕수궁 100선 전에서 두 그림의 배치가 어찌 되었는지 사실은 그게 궁금했다. 대작과 소품이란 크기의 차이 때문에 가까이 붙어 있지는 못했겠지만 마주 서서 째려보거나 혀를 껄껄 차지는 않았을 것 같다. 왜냐면 동서지간이니까,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중략)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의 시 '저녁에')
화가 구본웅은 이상에게 '친구의 초상'을 그려 주었다. 시인 김광섭은 친구인 김환기에게 '저녁에'란 시를 써 주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란 명화를 낳게 했다. 이상의 아내 변동림은 요절한 시인의 임종을 지켰으며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도 남편의 임종을 지킨 후 미술관을 지어 주었다.
덕수궁에 못 가본 것이 찜찜하여 안좌도 김환기 생가를 겨울 여행의 코스로 잡았다. 선착장 정자 옆 길가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화가가 그림 소재로 삼았던 박지섬과 반월섬을 둘러본 후 생가로 들어갔다. 아랫방 앞 툇마루에는 명함 크기의 사진을 확대 인화한 흐릿한 액자 하나가 벽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키 큰 화가의 팔에 매달려 걸어가는 키 작은 아내 김향안의 사진이었다. 인연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인연을 만드는 대장간이 있으면 근사한 인연 하나 두들겨 만들고 싶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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