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볼테르가 기가 막혀

입력 2014-02-06 11:08:27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 음모혐의에 대한 1심 재판의 결과가 오는 17일 나온다. 최종 판결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사건이 갖는 의미의 중대성에 비춰 지는 쪽은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 충격파는 조금 과장해서 진보와 보수 모두 재기불능에 빠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대법원으로 가기도 전에 이런 성급한 진단을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1심 판결이 헌법재판소에서 진행 중인 통진당 해산심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그래서 헌재가 판결을 내릴 때까지 보수와 진보는 치열한 '사상 투쟁'을 벌일 것이다. 아니 사이버 공간을 들여다보면 그 싸움은 벌써 시작됐다. 이 싸움에서 '종북 좌파'들이 구사하는 전술은 '톨레랑스'(tolerance) 곧 '나와 다름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다. 이 전술은 이석기 의원이 작년 9월 자신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처리하려는 국회를 향해 이미 구사한 바 있다. 그때 이석기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며 "21세기 국회가 3세기 전만도 못해서 되겠는가"라고 했다. 21세기 한국은 대혁명 전의 프랑스만도 못한 중세적 불관용의 암흑사회이고 자신은 그 광기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볼테르가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볼테르의 친구들'을 쓴 영국의 여류 전기작가 에블린 홀이 사상 탄압에 대한 볼테르의 자세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며 만든 말이다. 하지만 홀의 주장대로 볼테르의 생각은 분명히 그렇게 압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석기가 모르는 것이 있다. 볼테르의 관용은 자기와 같은 계몽주의자 엘베시우스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김정일 어록만 달달 외우지 말고 철학사도 공부하기 바란다) 엘베시우스는 종교에 근거한 모든 도덕 형태를 공격한 '정신론'이란 저서 때문에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파리 대주교는 기독교의 근본을 흔드는 책이라며 광분했고 소르본대학은 '독약의 정수'를 담고 있다며 저주를 퍼부었으며, 파리 고등법원은 소각명령을 내렸다.

볼테르도 '정신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사람의 잠재력은 똑같으며 따라서 교육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교육만능론은 까놓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상 탄압에는 강력히 맞섰다. 엘베시우스가 탄압에 못 이겨 자신의 사상을 몇 차례나 철회했다가 마침내 자기 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는 용기를 낸 데는 볼테르와 디드로, 루소 등의 지원이 있었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 한 가지. 과연 볼테르는 자신과 동료들이 추구한 계몽을 부정하는 생각조차 관용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계몽의 적'에 대해 불관용으로 일관했다. 만약 관용했다면 자기 부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상에 대한 부정을 관용하는 것은 반대자의 사상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사상의 자유를 기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 없이 볼테르의 관용론에 기대 '종북'을 옹호하는 난센스는 과거에도 있었다. 지난 2005년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한국전쟁은 통일을 위한 내전이며 여기에 개입한 맥아더의 본색을 제대로 알면 당장 그의 동상은 부서져야 한다"고 했을 때 당시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을 비롯한 여권 인사들은 하나같이 볼테르의 말을 인용해 강 교수를 감싸고 돌았다. 강 교수의 종북을 질타하는 국민이 사상의 탄압자인 것처럼. 볼테르가 환생해 6'25가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이며, 북한이 앙시앙 레짐의 프랑스는 명함도 못 내밀 광기와 반(反)계몽의 독재국가임을 본다면 이런 인용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기겁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관용론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무식한 인간들이라고 욕을 했거나.

그런 점에서 무분별하거나 왜곡된 볼테르 인용은 이제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관용은 무제한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계 없는 관용은 곧 관용 자체의 죽음이다. 자기 이외에는 불관용 하는 세력을 관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용은 관용할 수 있는 것에만 한정되어야 한다. 그러면 관용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골치 아픈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북한을 추종하는 이석기류의 생각과 행위는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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