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의 시와 함께] 오래된 책-이중기(1957~ )

입력 2014-02-06 07: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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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나이를 많이 잡수신 책이 있다

비바람 눈보라를 배경으로 일주문은 초라해도

봄여름가을겨울을 다 걸어야 옛날 경전에 닿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책으로 생을 연마했으나

철없는 것들이 번역본으로 읽어 오해가 많다

이 책은 원문으로 읽어야 티끌 같은 세상이 잘 보인다

허리 구부정한 부족국가 늙은이들이

불량기 많은 비바람 눈보라 노역을 시켜

단절 없는 인간의 시간을 집필한

오래된 미래,

흙으로 만든 책

- 시집 『오래된 책』, 신생, 2008.

책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자세히 읽어보면 그 책은 농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책 이야기가 아니라 흙 이야기이며 농사 이야기다. 우선 시 제목이 은유법이다. '농토는 오래된 책이다'라는 것이 제목에 담긴 의미이다. 흙이라는 책은 고전이면서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담겨져 있는 경전과 같은 것이다.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시의 형식으로 말한다.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은 세상 이치가 훌륭한 책 속에 적힌 이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로부터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 되는 일(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농사짓는 부모들은 자식에게 "너는 농사짓지 말고 살아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이 땅의 농부는 힘겹다. 지금도 쌀값이 가장 싸다. 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음에도 말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쌀임에도 그 귀중한 쌀을 생산하는 이들이 가장 힘겹게 산다. 그래서 농촌 마을엔 빈집이 수두룩하고 젊은이가 없다. 개와 늙은이가 마을을 지킨다. 시인은 흙에서 경제적 가치보다 귀중한 삶의 이치를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감동적인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 책으로 하는 공부만 공부가 아니라 흙에서 깨달은 공부가 더 귀중하다는 새로운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농사꾼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다. 이중기 시인은 영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농민시인이다. 더 근사하게 말하면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장이시다.

권서각 시인 kweon51@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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