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회사 '산재'판정 받기까지…불편한 진실
또 하나의 '사회 고발' 영화가 나왔다. 실제 사건을 르포르타주식으로 꼼꼼하게 재현해낸 영화와 법정 공방을 긴장감 있게 펼치는 서스펜스 법정영화가 성공하기 힘들었던 한국영화계였지만, 3년 전인 2011년에 전기가 마련된다. 바로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가 주인공들이다. 이 두 편의 성공 이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도 진부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잘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그리하여 화제를 모으며 탄생한 영화가 '남영동 1985'(2012), '26년'(2012), '노리개'(2012), '집으로 가는 길'(2013), 그리고 '변호인'(2013)이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첨가해야 할 요소는 영화의 '사회참여성'이다. 실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을 흥미 위주로 호기심만 자극하도록 만드는 방식을 버리고,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을 진전성을 가지고 수행, 영화적 감동은 극대화되고 관객은 절대적인 호응으로 화답했다. '변호인'이 그 정점에 서서 사회 고발 영화의 제작을 독려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주 개봉하는 '또 하나의 약속'. 이 작품은 스타 배우의 출연 없이도 실제 사건을 긴장감 있게 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영화적 노하우, 골리앗을 상대로 싸우는 비천한 개인의 이야기에 대한 대중의 공감 능력, 우리 사회가 비판을 수용하는 정도 등을 실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영화다.
속초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상구(박철민)의 딸 윤미(박희정)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 반도체 회사에 취직한다. 부푼 꿈을 안고 입사한 지 2년이 되지 않아 윤미는 백혈병에 걸려 사망하고, 평범한 가장이던 상구는 모두가 무모하다고 여긴 재판에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직업병 승소 판정을 받아낸다. 재판에 뛰어든 지 6년 만에 딸의 사망원인인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기적 같은 일이다. 재벌 기업이 개인적으로 합의하도록 회유하고 협박하는 지난한 과정이 영화에서 고스란히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개인이란 보이지 않는 탄탄하게 뿌리 내린 시스템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기계부품이 되고, 고장 나면 버려지는 쓰레기가 되어가는 현실을 생생하게 고발한다. 게다가 이 영화는 실화이고, 주인공이 싸우는 대기업은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의 활약이 이 영화를 낳은 동력이 되었는데, 이미 58명이 사망하고 151명의 피해자가 접수되었다고 한다. 김태윤 감독은 '그것이 알고 싶다'와 '추적 60분'을 통해 이 사건을 접하고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를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사건의 주인공들과 교류하며 시나리오를 썼다.
대기업에 입사한 딸이 18개월 만에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온 것, 수원병원에서 속초로 돌아오는 택시 뒷자리에서 딸을 보내야 했던 아버지, 산재 신청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대기업으로부터 제안받은 500만원이 10억원으로까지 올라간 일, 반도체 공장 1개 라인에서 팀장, 부팀장, 동료들이 백혈병과 림프종에 걸려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엔지니어의 겁에 질린 증언, 국회 국정조사에서 증언을 약속한 엔지니어의 배신 등 영화에 담긴 에피소드들은 모두 팩트에 기초한다.
이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극적인 드라마로 엮여 한 편의 사회 고발적인 가족드라마로 완성되었다. 영화는 개인과 대기업 간의 투쟁을 다루며, 동시에 가족의 가치와 모녀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협박은 물론 달콤한 자본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한 개인의 용기와 마주한다. 마치 신파처럼 우연성으로 가득한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이 실재임을 알고 나니, 복잡한 세상이 더욱 비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숭고한 개인의 의로운 싸움이 던지는 카타르시스는 오히려 세상을 행복하게 바라보게 한다.
이런 영화다. 그러니, 용감하고 무모한 제작진에 투자하겠다는 영화사가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 '또 하나의 약속'은 한국영화 사상 진기한 기록을 쓴다. 그것은 기존 상업영화의 투자, 배급 방식이 아닌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개인투자금으로 제작비를 마련한 최초의 한국 영화라는 점이다. 개인투자자를 모아 10억원의 투자금을 마련하여 영화가 제작되었고, 배급과 마케팅 비용 5억원도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마련했다.
불가능의 영역에 집단의 힘으로 도전한 최초의 영화. 그러나 그 앞길은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벌써 이 영화의 상영관이 대폭 축소되고 있다는 믿기 싫은 뉴스가 들린다. 우리 내부의 비판적 목소리를 차단할 때 그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앞으로 사회 고발 영화의 제작은 활발하게 이어질 전망이다. 증권가에 뿌려지는 음모론의 유통을 파헤치는 '찌라시: 위험한 소문'이 개봉을 앞두고 있고, 대형마트 계약직 직원들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는 내용을 담은 '카트',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의 진실을 그리는 '제보자', 용산 참사 사건을 모티프로 한 '소수의견', 언론사 기자를 소재로 한 '주기자' 등이 제작되고 있다. 2014년 한국영화계는 한마디로 '사회 고발'이라고 봐도 될 정도의 라인업이다.
2014년은 새로운 전기의 해가 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그 시험대 위에 '또 하나의 약속'이 서 있다.
정민아 영화평론가 yedam98@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