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비슬산의 다른 명칭도 바로잡아야

입력 2014-01-30 10:00:09

세계적인 도시는 모두 명산과 함께 큰 강을 끼고 있다. 대구도 예외는 아닌 듯 북쪽에는 팔공산이 우뚝 솟았고, 금호강이 동서로 흐른다. 남쪽에는 정기 어린 비슬산을 곁에 두고 영남의 젖줄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휘돈다. 팔공산과 비슬산은 대구의 아늑한 품과 같다. 단풍 소식에 눈 내리고 꽃 피우는 화두는 단연 팔공산이 먼저고, 비슬산의 맥과 정기는 도심의 성불산까지 고스란히 이어왔다. 더 깊게는 연귀산에서 와룡산까지다.

이런 대구에는 주요한 명산이 위치와 지명마저 다르게 표기된 것이 더러 있다. 비슬산에 월선봉'석검봉과 앞산에 성불산'비파산이 그렇다. 동일한 능선에 한 몸통을 이룬 산에서 덧붙은 산봉우리 같은 작은 산은 유래에 따라 봉(峯)이란 끝 자를 붙여 따로 지어지는 게 대체적이다. 성불산의 명칭이 앞산으로 지어졌고, 거기에 조그만 봉우리가 대덕산'산성산'비파산'월배산이란 이름으로 따로 지어져서 그렇다.

산 이름은 토착민이 살아오면서 알기 쉽게 지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하나 기록을 더해 남겼을 것이다. 대구의 산 이름을 역사적 기록을 찾아 차례로 살펴보면 이렇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포산이성'의 글귀에서 포산(包山)과 소슬산(所瑟山)이란 명칭이 처음 나타났다. 포산은 숲이 무성하다는 뜻, 관기와 도성의 전설 같은 기록에서 나무가 누울 정도로 숲이 무성했던 만큼 그게 지금의 비슬산이다.

'조선지도'의 경상도지리지에서 '비슬산'(毗瑟山)을 기록했고, '세종장헌대왕실록' 지리지에 비슬산 대견사 석상 장육관음에서 땀이 흘렀다는 기록과 진산 연귀(鎭山 連龜)와 공산을 기록해 대구에는 비슬산'연귀산'팔조현'법이산'공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서도 '비슬산'(毗瑟山)을 기록해 이때까지 한자 표기를 모두 지금의 비슬산(琵瑟山)과 달리 비슬산(毗瑟山)으로 기록했고, 해안현 북쪽 공산(公山)에 산성이 있다고 기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연귀산'공산'마천산'왕산'팔조령'비슬산'금사산(金寺山)을 표기했고, 공산성과 성불산 고성을 표기했다. 이로써 대구의 산은 비슬산'연귀산'팔조현'법이산'공산에 이어서 금사산'침산'마천산'왕산'팔조령이 있다고 기록됐다.

'여지도서'는 최정산'조족산'성불산을 기록했고, 덧붙인 '여지도'에 비슬산을 그린 뒤 봉우리마다 천왕봉'대견봉'조화봉을 따로 그렸다. '대구읍지'(大丘邑誌)는 성산'와룡산'라가산'동학산'화암을 새로 기록했다. 한편 성불산은 관기안산(官基案山)이며, 맥은 비슬산에서 이었다. 연귀산은 진산이고, 그 맥은 성불산에서 이어 왔다고 기록했다. '교남지'(嶠南誌)는 구약산'형제산을 기록했고, 비슬산 천왕봉을 기준으로 북쪽에 수도봉'석검봉을, 남쪽엔 대견봉'조화봉'관기봉'월선봉'필봉을 기록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문헌임에도 고문헌 상의 모든 산도 빠짐없이 그대로 표기했다는 자체가 신빙성이 크다.

지금 비슬산 월광(光)봉은 교남지에 처음 오른 게 월선(先)봉이다. 한자 이기 과정에 오기로 여겨지고, 위치는 천왕봉과 조화봉 중간이다. 석검봉은 천왕봉 북쪽이다. 조화봉 아래 일명 칼(톱)바위는 풍화암석일 뿐 봉우리가 아닌데도 석검봉이란다.

앞산은 앞에 있는 산이어서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일 뿐, 지명은 성불산이다. 그러므로 대덕산성도 성불산성이 걸맞다. 앞산 항공무선표지소에 산성산이란 명칭은 산성도 없었던 엉뚱한 봉우리에 붙였다. 성불산은 관청에서 마주하는 관기안산이고, 비슬산은 풍수학상 관기외안산으로 불러 비슬산의 지맥을 따라 그 정기가 대구까지 뻗은 주요한 산이다. 하지만 개발을 빌미로 맥이 끊어진 곳도 많지만 명칭마저 다르다면 그 정기가 이어질까 의문이다.

달성군은 지난 1월 27일 지명위원회를 개최해 주봉을 천왕봉으로 결정하면서 대견봉 표지석은 원래 자리에 이설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실과 다른 또 다른 지명은 언급이 없었다. 한 번 더 검토되어야 할 사안으로 여겨진다.

권영시/전 앞산공원관리사무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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