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대학 졸업이라는 스펙에다 키 크고, 인물 좋고, 성격까지 좋은 신문사 입사 동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학교후배였는데, 큰 인연이 아니었던지 입사 1년여 만에 서울로 떠나 가끔 전화나 페이스북을 통해 안부를 전한다. 얼마 전 그가 꽤 크고 유명한 출판사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벌인 사업도 있었는데 사양산업인 '출판업'에 뛰어던 이유를 물었더니 "늘 꿈꾸던 분야였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는 몰라도 그가 출판사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돼, 곳곳에서 책 출판 소식이 들렸다. 대구'경북에서만도 수십 건인데다 전국을 따지면 셀 수 없이 많겠다 싶어 역시 뭔가 앞서 가는 감(感)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출판사업은 여전히 끝 모를 불황 속이었다. 독서를 하지 않는 세태와 오디오북, 전자책에 밀려 나아질 전망도 전혀 없었다. 왁자지껄한 책 출판 소식은 엄밀히 말하면, 책이 아니라 기념회에 초점을 맞춘 출판 이벤트였다.
'책보다 기념회' 행사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올해처럼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몇 달 앞두고 집중되며, 지은이가 선거 출마 후보자라는 것이다. 또, 제목이 거창하고, 평생을 지역이나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노심초사했다는 자찬 내용이 많다. 행사에 초대받은 이에게 즐거움보다 걱정거리를 안긴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안 갈 수도 없고, 가려니 책값을 얼마나 내야 할 지가 고민이다. 몇십만~몇백만 원을 쉽게 넣을 수 있다면야 별문제지만, 한두 곳도 아닌데다 최소한 다른 이와 비슷하게는 내야 체면이 선다는 부담이다.
아예 책값을 안 받으면 되지만, 선거 출마 예정자면 무료 배포가 선거법 위반이다. 이런 말썽이 일자 서울에 이어 대구에서도 출판기념회를 하려던 어떤 분은 1만 몇천 원인 정가만 받겠다고 해명하는 촌극도 있었다. 아예 책을 없애고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내용을 설명하는 '책 없는 출판기념회'라는 아이디어를 낸 분도 있다.
종이가 없어 대나무에 글을 쓰던 시절, 책을 한 권 만들려면 귀찮은 몇 절차를 거쳐야 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출(汗出)이라하여 대나무를 자른 뒤, 불에 쬐어 수분을 빼고, 대나무의 푸른 색을 없애는 살청(殺靑) 과정을 거쳤다. 이렇게 만든 대나무 조각은 죽간(竹簡) 또는 한간(汗簡), 편지를 쓴 죽간을 서간(書簡)이라 했다. 글을 쓴 죽간을 일정한 차례대로 모아 끈으로 꿴 것을 책(冊)이라 했다.
역사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청사(靑史)는 푸른색의 죽간에 역사를 기록한 데서 비롯한다. 종이가 발명되고, 인쇄술이 발달한 뒤에도 선비는 책 내기를 두려워했다. 말선지재(襪線之材'버선의 실을 뜯거나, 버선 정도나 만드는 하찮은 능력), 기문지학(記問之學'기억하고 묻기만 하는 낮은 학문 수준)이라는 겸양과 염치를 알고 있어서다.
겸양과 염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역작(力作)을 사장시킬 수 없고 경륜을 펼친다는 시대적 소명 때문에 개최하는 출판기념회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유권자에게 이름을 알리고, 언론 보도 빈도를 높일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마다치 않을 것이 예비 후보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면 안 갈 수 없는 인사가 많으니 문제다. 몇 년 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으려는 한 후보의 출판기념회에 수천 명이 몰려 기념회장 일대가 교통마비로 소란을 빚은 적도 있었다. 이런 성황이 출마 후보와 지지자에게는 영광이다. 그러나 후보자의 현재 위상 때문에, 또는 앞으로 가지게 될지도 모를 위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험 드는 심정'으로 가야만 하는 이는 곤혹스럽다.
대대적인 출판기념회의 목적은 선거 출마를 알리고, 지지를 부탁함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부탁하면서 정가의 몇 배가 넘는 책값을 받으니 세상에 이렇게 쉽고, 이문 많은 장사도 없는 듯하다. 한 술 더 뜨면,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각종 경조사 때 부조는 못 하게 하면서 이런 출판기념회는 허용하는 선거법도 못마땅하다. 부조와 책 무료 배포가 선거법 위반이면, 정가보다 많이 받는 '책장사'도 선거법 위반이어야 형평성이 맞다. 정가만 받아도 지은이와 출판사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데, 정가의 수십, 수백 배를 받아도 괜찮으니 참 잘 만든 선거법이다. 이래서 정치인들이 앞에서는 허리를 숙이다가도 돌아서서는 '유권자는 봉'이라고 속닥거리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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