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덕수궁 미술관을 찾았다. 192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대표작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여러 미술품을 실제로 보는 감동은 CD로만 듣던 오페라 아리아를 배우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것과도 같았다. 내 머릿속에 40호 정도로 저장되어 있던 박수근의 '빨래터'가 3호짜리 작은 그림인 것도 의외였다.
나는 특히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대가족이 모여 생일잔치를 하고 있기도 하고, 파이프를 문 멋쟁이 신사도 있었다. 아이를 업고 절구질하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꽃을 단 모자를 쓴 여인도 있었다. 시대가 다르고 구상과 추상의 접근이 다를 뿐 내 이웃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림 밖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어른에, 학생에, 주말이라 선지 선생을 따라나선 조무래기들도 끼어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의 설명에 따라 그림 속과 그림 밖을 들락거렸다. 입을 헤 벌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림 속으로 들어갔던 아이들은 일행을 잃고 황급히 그림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카이로 나일강변 에지프트의 여인'이 되어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가 집 나간 '길례언니'를 잠깐 생각했다. 시어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급히 나가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합류했다. 젖먹이를 어머니에게 넘기고 큰아이 옆에 서니 바둑이가 먼저 나와 있었다. 가족이 된 지 오래된 강아지였다.
관람이 끝나 기념품 가게로 들어갔다. 달력을 살까, 도록을 살까 만지작거리는데 수첩 표지를 장식한 '아악의 리듬'이 눈에 들어왔다. 청각장애인인 김기창의 그림이었다. 선들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눈이 다 시원했다. 친구들에게도 선물할 겸 몇 개 손에 넣었다.
이 무슨 우연일까. 전시장 밖으로 나오니 정문 쪽에서 아악 소리가 들렸다. 수문장 교대 행사 중으로 보였다. 그들이 내가 산 수첩의 표지를 보았을 리도 없고 그림 속에서 아악이 튀어나왔을 리도 만무하건만 나는 어쩐지 양쪽이 합주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신구와 안팎의 합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짐승이나 꽃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남은 얼마나 큰 행운일까. 제아무리 영특한 짐승이라도 그림을 그리거나 아악을 울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아름다운 꽃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작가의 고뇌와 슬픔에 공감할까. 아악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문을 향해 천천히, 좀 걸었다.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있는 덕수궁을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다 보니 겨울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이 보였다.
소진 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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