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르개·돌칼·돌도끼 만들던 선사시대 '하이테크' 단지
전문가들은 인류의 문명은 직립(直立)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머리가 위로 향하면서 두뇌 활동이 자유로워졌고 전신을 두 발로 지탱하면서 자유롭게 된 두 손은 무언가 공작(工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른바 공작인(Homo Faber)의 출현이다. 이전의 인류는 자연 상태의 돌을 있는 그대로 사용했다. 칼이 필요하면 날카로운 돌을, 사냥을 할 때는 뾰족한 돌을 가공 없이 썼다. 공작인의 출현 이후 인류는 본격적으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이 조그만 시도가 바로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도구 제작으로 논점을 좁혀 보자. 대구의 월성동 구석기 유물 중에 재미있는 게 있다. 바로 석기제작장이다. 석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 시대에 그런 수준까지 기술적 분화가 가능했을까?'라고 의문을 품을 만하겠지만, 유적은 '그렇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선사시대 우리 지역에서는 꽤 높은 수준의 석기가공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당시에 석기, 도구는 의식주는 물론 생활 전반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그 기술력의 중요도는 지금의 우주항공 분야나 첨단 IT 공장과도 충분히 비견할 만하다 하겠다. 2만 년 전 대구의 '첨단기술' 석기제작장으로 가 보자.
◆영남지역에서도 10여 곳 발견=석기제작장의 발굴은 전국적인 현상이다. 지역에서도 고령, 김천, 양산, 울산, 진주 등 10여 곳에서 석기 공방 유물이 발견된 바 있고, 전국으로 범위를 넓히면 수십 곳에 이른다. 요즘 마을마다 카센터가 들어서 있듯 웬만한 규모의 촌락에는 별도의 공간을 두고 석기를 제작했음을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다.
1998년 진주 남강에서 발견된 석기제작장은 특히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규모가 크고 작업공정이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어 전문 장인(匠人)의 출현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 공방이 당시 잉여생산물이 늘고 사회 계층 분화가 일어나면서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계층 일부가 운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석기 제작이 한 부족의 자급자족 단계를 넘어 이웃 집단과 교역을 위한 상품 생산 단계까지 진행했다는 점에서 연구원들의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규모 면에서는 고령 봉평리 유적지도 주목할 만하다. 이곳에서는 석기 제작에 필요한 몸돌과 받침돌(臺石), 망칫돌 등 도구를 비롯해 제작과정에서 생긴 많은 얇은 조각들이 출토돼 당시 대규모 석기제작 유적지로 확인되었다. 유물의 출토 양상과 밀집도, 입지조건을 검토해볼 때 이 공장은 상당히 오랜 기간 운영되었고, 생산된 물건은 타 집단에 공급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월성동 석기제작장 실체=이제까지 선사시대 석기 유적이 발견된 곳은 수백 곳에 이른다. 물론 구석기부터 철기시대까지 합친 숫자다. 단양 수양개, 연천 전곡리 등은 모두 수만 점이 출토돼 전국 최대급 규모를 자랑한다. 해당 지자체들은 선사시대 유물을 상표화해 일찌감치 관광자원으로 개발했다.
수천~수만 점이 쌓인 돌무더기 속에서 어떻게 석기제작장을 알아낼까. 방법은 뜻밖에 간단하다. 한 공간 안에 작업공정이 모두 갖춰져 있으면 석기 제작 공장으로 인정된다. 즉, 현대 석재 공장에서 집채만 한 원석이 설계에 의해 커팅되고 조각, 연마를 통해 돌탑이나 비석이 완성품으로 나오는 공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제 월성동 석기제작장으로 들어가 보자. 월성동 유적에서 석기제작장으로 보이는 곳은 모두 4곳. 이곳은 대규모 석기 군집이 관찰된 곳이다. 발굴단이 '주석기제작장'이라고 명명한 4곳은 중앙에 6, 7개 정도 광장을 두고 원형으로 배치되었고 나머지 4곳 모두 비슷한 규모다.
이곳에서는 석기 제작의 주요 소재인 원석(몸돌)과 몸돌을 때리던 망칫돌, 여기서 떨어져 나온 격지(몸돌에서 떼어낸 1, 2차 가공돌), 긁개, 새기개, 찌르개, 흑요석 등 1만3천여 점이 발견됐다. 이 돌들을 받치던 받침돌(臺石)과 공작 시 받침으로 사용하는 모루돌이 함께 출토돼 이곳에서 석기 제작의 모든 공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발굴에 참여했던 삼한문화재연구원 김구군 원장은 "몸돌로 쓰인 재료는 혼펠스 계열로 지금의 구들장과 유사한 재료"라며 "이 돌은 결이 나 있어 절개가 쉽고 날카로운 단면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라고 말한다.
◆몸돌에서 새기개'찌르개'긁개 등 용도대로 가공=가공과정을 들여다보자. 강도가 센 망칫돌로 몸돌을 때리면 다양한 크기의 파쇄돌(격지)이 나온다. 떨어져 나온 격지를 모양과 크기에 따라 돌칼, 새기개, 찌르개, 긁개 등의 용도로 재가공하는 방식이다. 특히 찌르개가 많이 출토된 점이 시선을 끈다. 찌르개는 구석기 당시 칼과 송곳의 기능을 했던 도구로 찌르개가 집중된 이유는 이곳 생활환경, 음식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삼한문화재연구원 양하석 연구실장은 "찌르개는 농사와 수렵에서 두루 쓰이는 도구"라며 "이곳 지형상 농경, 사냥, 어로 작업 과정에서 이 도구가 가장 요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진단했다.
출토된 일부 유물 3점에서는 타제기법 외에 잔손질 흔적까지 나타나고 있어 연구원들은 이 돌들을 '세석기'로 따로 분류했다. 이 형태는 동아시아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양식이어서 앞으로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구석기 타제석기가 신석기 마제석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양식 중 하나로 보고 있다.
◆구석기시대 국가산업단지 석기제작장=구석기시대 당시 생활 전반은 석기, 도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도구를 제작했던 공방은 주민의 생존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 시설이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요즘으로 치면 '국가산업단지'쯤 되지 않았을까. 지금 산업단지야 경제가치, 효율성을 따졌지만, 선사시대 석기공장은 부족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으니 중요도에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지금 산업단지엔 IT, 자동차, 의료기, 중장비 등 핵심기술 등이 망라된다. 2만 년 전 구석기 시대 대구 국가산단의 생산품목들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런 것들이 아니었을까. 찌르개, 새기개, 긁개, 몸돌, 격지, 받침돌, 좀돌, 격지, 끝긁개, 돌날. 뚜르개, 망칫돌, 좀돌날몸돌, 스키형격지, 세석기….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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